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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Oct 26. 2021

시대가 지나도 영어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_강준만 「한국인과 영어」

강준만은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에 대해 책을 쓰는 취미가 있다. 이 책은 그 취미의 결과인데, 이번 주제는 영어다. 시대별로 톺아본다.



앞부분은 대한민국의 영어 광풍에 대한 분석이다. 의견은 최대한 절제하고 단순 기록의 나열로 진행된다. 요약하자면 영어에 목숨을 건다는 거다. 시기가 지나면서 사건이나 이슈의 이름만 달라졌지, 양상이 너무 똑같아서 지루할 정도였다. 뒷부분은 본격적인 주장이 나온다. 저자의 생각이 나와 너무 똑같아서 충격이었다.


제1장 개화기~일제강점기


1797년 영국 탐험선 프로비던스호가 조선에 정박해서 소통을 시도했으나 말이 안 통했다. 최초로 영어를 공부한 조선인은 김대건 신부다. 6개의 언어를 구사했으나 26세에 순교했다. 선교사에 의해서 영어가 전해졌고, 1879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되면서 한국 교회가 출발했다. 영어 천재 윤치호는 일본 유학중에 김옥균에게 영어의 중요성을 전해들었다. 일본에서 넉달 간 영어 공부를 했고, 이 실력으로 미국 공사의 통역을 맡았다. 1883년에 조선 정부는 미국에 사절을 파견했다. 통역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복잡한 통역 절차는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조선어-영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보빙사 일행엔 중국어-영어, 일본어-영어, 조선어-중국어, 조선어-일본어를 구사하는 통역관 4명이 포함되었다. 이런 식이었다. 아서가 영어로 말하면,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이어 조선어-중국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겼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똑같은 방식으로 일본어-영어 통역과 조선어-일본어 통역을 활용함으로써 두 가지를 종합해 의사소통을 했던 것이다.


1885년에는 배제학당이 설립허가를 받고, 1886년에는 육영공원이 만들어졌다. 고관 자제들이 영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영어를 잘했던 이하영과 이완용은 출세했다. 이승만도 영어실력에 두각을 보였다. 영어가 출세의 도구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로 접어들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영문란을 만들었다.


영어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권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좀 다른 양상을 보이긴 했지만, 영어가 사교권 장악 수단이었으며, 일제의 패망 조짐이 보이면서 영어가 복음의 소리가 되고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는 건 이후 전개될 한국에 불어닥친 '영어 패권주의'를 예고한 셈이다.


제2장 해방정국~1950년대


1945년 미군이 들어와서 해방 정국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은 스스로 점령군 지위로 포고했기 때문에 점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을 미국의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기본 자세는 9월7일에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제2호, 제3호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포고령 제1호는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지위로 한반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고 했다. 포고령 제2호는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 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고 했다.


미군은 일본에 의지해 행정을 운영했다. 이제 영어는 본격적으로 생존 무기가 되었다. 통역관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통역을 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 이는 대지주나 친일파 가문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초대 정부에서는 대통령도 영어를 잘 했지만, 각료도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우대받았다. 모든 보고서를 영어로 만들어야 했는데, 한글을 모르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서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노래는 뜬금없이 영어를 가사에 넣는 게 유행이었다. 이건 지금도 비슷하다. 미국에 다녀온 기자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관훈동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름은 관훈클럽이라 붙였다. 언론인들이 기레기라는 멸칭을 얻기 전까지는 나름 위세를 부렸던 모임이다.


제3장 1960년대~1980년대


4.19혁명 이후 등장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둘다 영어 능통자였다.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도 미국의 응답만을 기다렸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는 남로당(남조선로동당) 출신이었기 때문에 미군으로부터 사상을 의심받았다. 그래서 미국통인 장준하가 미군과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나중에 장준하는 방향을 바꿔 반독재의 길을 걷게 된다. 1970년대에는 수출 전쟁이 시작되었다. 말 그대로 전시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출에 걸림돌이 되는 게 있다면 사령관인 대통령이 직접 해결했다. 밀수를 저질러도 수사 중단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재벌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영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도 있었다. 한글날이 국경일로 정해졌고, 방송 프로그램 이름과 연예인 이름이 한국어로 바뀌었다. 1980년대에는 영어 조기 교육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격 없는 영어 강사들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영어에 미쳐간다는 비판과 10년 넘게 영어를 배웠어도 영어 한마디를 못한다는 비판이 동시에 나오는 시기였다.


제4장 1990년대


이제 영어 열풍에 맞서서 주체의식을 외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국제화와 세계화를 외치는 소리만 쩌렁쩌렁 울린다. 대학교에서 전공 강의를 영어로 하기 시작했다. 영어 간판의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미장원이라고 써있는 미장원은 없었다. 조기 유학의 붐이 일었다. 더빙되던 '톰과 제리'가 자막과 함께 영어로 송신되기 시작했다. 회화에 능통한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영어 교사도 과외를 받아야 했다. 카투사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학원이 생겼다. 직장에서 토익 점수를 따지면서, 직장인 토익 열풍이 불었다. 복거일이 영어공용화론을 제시했고, 찬반의 입장이 거세게 붙었다.


제5장 2000년~2002년


사회계층별로 영어에 대한 대응이 다르다. 취상위 계층은 대체로 조기유학을 선택했다. 적어도 영어 하나만큼은 잘 해서 돌아왔다. 이는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재생산하는데 도움을 줬다. 중산층은 이민을 떠났다. 아파트를 팔아서 영어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서민은 영어 과외를 했다.


제6장 2003년~2007년


여러 지역에 영어마을이 생겨났다. 토익 열풍은 토플 대란으로 이어졌다. 응시생이 너무 많아져서, 원서 접수를 내는 것도 경쟁이었다. 응시권이 비싸게 팔렸다. 초등학생은 미국 영어 교과서를 공부했다. 대학에서는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아졌다. 대선후보들이 영어 교육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제7장 2008년~2014년


2007년 12월 27일, 서초구청에 영어회의를 시작했다. 무역회사도 아니고 구청에서 간부회의를 영어로 하는 거다. 얼마나 활발한 토론이 되었을지는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비즈니스 프렌들리, 노홀리데이 등 영어식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과거 '오렌지'라고 말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고, '아린지'라고 말했더니 알아들었다며, 외래어표기법을 바꾸자고 주장했다. 사모펀드가 학원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미군 학교가 인기를 끌었다. 학생 대부분은 한국 학생이었는데, 불법 입양을 통해서 국적 세탁을 하면 입학할 수 있었다. 언론사에서 영어 강의 비율을 바탕으로 대학을 서열화하기 시작했다.


맺는말


영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없다. 이점에 동의하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 대부분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니라고 외칠 뿐이다.


결국 다시 문제는 내부의 치열한 경쟁이다. 영어는 그런 경쟁의 변별 도구로 동원된 것일 뿐이다. 치열한 경쟁을 완화시킬 수 없다면, 결국 영어 전쟁은 우리의 숙명인 셈이다.


필요도 없는 영어에 너무 많은 사교육비와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미국과 관련하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 사실상 미국의 51번째 주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그러면 영어 경쟁을 약화시키면 되는 건가? 약화시킬 수 있는 건가? 영어 문제 하나만 해결한다고 끝날 것도 아니고,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그마한 대한민국에서는 생존경쟁과 인정투쟁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하고, 남보다 잘 해야한다. 그 무언가가 영어인 거다. 내부 서열을 정하기 위한 도구기 때문에, 전국민이 영어를 잘하게 만드는 정책은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지금처럼 상향평준화되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상대적인 등수다.


학벌이 삶의 모든 걸 결정하는 사회에서는 대학 입시에 목숨을 걸게 된다. 수능 하나로 계층이 결정되면 그 이후의 노력은 큰 의미가 없다. 만약 두번째 기회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가질 것이다. 수능에 목숨을 덜 걸 수 있고, 수능 이후에도 노력할 대상이 생긴다. 그게 영어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대학입시만큼 중요한 것들이 많아지면 병목 현상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서열 타파를 포기해야 서열 유동화가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다원적 경쟁 체제'다. 그래야 경쟁의 병목 현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평생 경쟁 체제로 갈 수 있다. 즉, 대학의 기존 '고정 서열제'를 노력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변동 서열제'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 시대가 지나도 영어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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