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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디 Jan 03. 2020

내일을 위한 개인주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았다.

! 본 게시글에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개인주의자 선언>의 초반부는 공감의 연속이었다. 나도 내 울타리 밖에 있는 것들엔 무신경한 성향을 가진 자칭 개인주의자였기에 개인주의 성향에 대한 심층적 고찰이 담겨있는 책일 것이라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은 칼에 찔릴 위험 없이 새벽까지 젊은이들이 술 먹고 길바닥에 쓰러져 자기도 하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건 지극히 남성 위주의 시각이다. 밤늦은 시간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에 의지하며 빠른 걸음으로 귀가하는 나와 문유석이라는 개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저 문장 하나로 책과 나 사이에 벽을 느끼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문유석 판사가 바라보는 사회와 내가 바라보는 사회는 어쩌면 180도 다를 거라는 벽. 그래서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그저 대한민국/남자/판사의 일기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적잖이 들었다. 그러니까 잔뜩 삐뚤어진 내 시선으로 보자면 <개인주의자 선언>은 결국 '일반적 꼰대'가 아닐 뿐 '대한민국 사회'에서 오래전부터 기득권층인 문유석 판사의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여유 있는 고찰 정도의 글인 것이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는 산드라와 동료 사이에 문이나 소품 등을 통해 화면을 분할함으로써 타인을 자신의 경계선 안으로 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산드라를 들인다고 해서 마냥 선인 것도 아니고 산드라를 울타리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악인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들은 적어도 문유석 판사의 책에서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너스는 말 그대로 보너스다. 당연히 받아야만 하는 돈이 아니다. 산드라의 일자리를 박탈시키고 받는 돈이다. 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보너스를 선택해야만 하는 구실이 있기 때문에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 1000유로만 있으면 새 출발을 할 수도 있고, 가정을 지킬 수도 있다는데 누가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동료의 복직보단 보너스를 택할 만큼 삶이 팍팍한 산드라의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책의 흐름이나 깊이에 대한 내 감상과는 별개로, 해고당할 위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부모님과 함께 사는 덕에 생활비 걱정 없이 사는 현재 나의 입장에서는 문유석 판사가 제시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의 방향에 대해 동의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해준 알퐁스(솔왈의 계약직 노동자)가 딱 그렇다. 처음엔 자신의 계약 연장을 위해 보너스를 선택했지만, 결국 용기를 내어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한다. 그랬기에 투표가 끝나고 산드라가 계약직 알퐁스의 자리에 대신 들어갈 거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을 함으로써 알퐁스는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유석 판사가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가 아름다운 방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영화에 적용해보고자 한다면 글쎄. 앞서 말했듯 문유석 판사가 기득권층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에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도 없는 산드라의 동료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개인을 포함한 사회가 잘 굴러가기 위한 합리적 개인주의의 선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정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다.



2018-09-07


이 책을 지금 다시 읽으면 재작년과는 다르게 읽힐 같다. 시간이 되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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