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견고하고 유연해야 하는 것
‘안녕하세요. 인사 한번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한국소방산업기술원에 교육 온 김에 A직원과 전화를 하고 만났다. 작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서로 노고가 많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짧은 만남은 끝났다.
이산화탄소 소화설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전기실 같은 곳에 주수화재를 할 수 없을 때 질식소화를 이용해서 소화하는 설비이다. 소화 효과는 확실한데 문제는 사람까지 질식된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이런 안 좋은 일들이 몇 차례 발생하다 보니, 많은 회사가 이산화탄소 소화설비의 대체품을 찾았다. 그래서 눈에 띈 것이 할로겐화물소화설비이다.
B회사 역시 위와 같은 고민으로 나를 찾아왔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위험물안전관리법의 세부기준에 걸렸다. 세부기준의 핵심은 전기실등의 체적이 1000㎥이 초과하면 HFC-23같은 소화약제를 사용하는 할로겐화물소화설비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과학적인 물성의 실험치에 결과이겠지만, 나는 이 기준이 합당한가 그런지 않은가를 판단하기 이전에 이 기준이 법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결국 B회사는 소방청에 질의응답을 했고 여러 방법을 강구해도 현재 법으로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위험물안전관리법에는 특례가 있다. 법에서 정한 기준보다 많은 소화설비로 무장을 하거나, 그 기준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소방산업기술원에서 열리는 안전성평가를 통해서 말이다. B회사는 전력을 다해서 심의위원들 앞에서 안전하다고 호소를 했지만, 결국에는 부정적 판정을 받고 말았다. 그 과정을 담당하던 A직원과 교류가 있었기에 인사를 나눈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지난 1년동안 골머리를 썩던 일이었다.
2022년 1월 3일에 가스계 소화설비 기술기준 특례적용 지침이 시달되었다. 전기실등의 체적이 1000㎥이 초과해도 적정 조건을 만족시키면 할로겐화물소화설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머리가 아프던 많은 이들이 타이레놀을 먹은 것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선을 긋는 일은 신중해야 하고 지우개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소방공무원인 나는 소방시설법과 화재안전기준이라는 선 안에서만 의사결정을 한다. 그 선이 불합리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지우개가 중요한 것 같다. 현실과 현장은 이만큼 앞서간다. 법은 견고하지만 유연해야 한다. 그라핀 같은 신소재 개발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