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나에겐 수행이다.

우아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

by 젤라의 일기장

얼마 전에 한국 무용 수업에서 쫓겨났다.


“젤라님, 더 이상 이 수업에 오지 마세요.”

원장님은 사뭇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왜 기본반만 수강하세요? 이제 졸업할 때가 됐어요.”

일 년 넘게 다니면서도 기본반을 고수하는 내가 답답하셨나 보다. 수업 담당 선생님도 한마디 거든다.

“맞아요. 다음에는 다음 단계 수업으로 신청하세요. 어려운 것도 자꾸 해봐야지요.”

나는 마지못해 그겠다고 대답했다.


나의 춤 동반자인 장미에게 기본반을 강제로 졸업하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장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아직 기본기가 부족한데 말이야. 굴신이랑 호흡을 제대로 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언니 내 생각엔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취미잖아요?”


장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다르다. 나는 전공자처럼 높은 수준을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기본을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느끼고 몸을 단련하고 다듬는 시간이 좋을 뿐이다. 몇 년 전부터 갱년기를 보내면서 춤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 변했다.


예전에 내게 춤은 ‘자기만족’, ‘못다 이룬 꿈’ 같은 거였다. 이제는 그저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나는 춤을 춘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마치 전설의 무용수라도 되는 것 같지만 정말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이제는 남 부럽지 않게 잘하고 싶은 마음이나 어려운 안무를 멋들어지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


그저 기본기를 닦으며 내 몸에 집중하고 그 시간을 오롯이 ‘지금 여기’에 머무는 몰입을 경험하며 즐거워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부족한 것이 느껴지고 기본반에 붙박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 말대로 취미로 즐기기엔 기준이 너무 높은 것도 맞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몸에 머무르는 시간이 좋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몸에 머물고 있지만 온전히 그런 시간을 즐기지 못한다. 인식하지도 못한 채 하루를 보내다 보면 점점 마음도 지쳐가곤 한다. 아주 잠시라도 몸에 머물며 쉬는 시간을 갖는다면 삶이 정말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조금 덜 지치고 조금은 덜 사납게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이 말랑하게 느껴질 거라 믿는다.


사라 카우프먼의 [우아함의 ㅣ기술]이란 책에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이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나의 언행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둔감해져 있다고. 그래서 우아함을 잃고 있다고 말이다. 우아함을 잃는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에서만 멀어진 게 아니라 우리의 몸에서도 한참 멀어져 버렸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몸을 떠나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이제 내게 춤은 이런 것이 되어 버렸다. 몸에 머물고, 날 찾고, 만나고 쉬는 시간으로. 점프를 뛸 때도 어지럽게 돌 때도 나는 내 몸에 머문다. 그러려면 현란하고 어려운 것보다는 기본 동작을 심도 있게 연습하는 게 딱 좋다. 마치 수행하는 것처럼 나는 몸을 단련한다. 그러다 보면 우아한 할머니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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