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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Feb 26. 2016

ANU, 너희들

그렇게 돌아왔다 - 캔버라의 교환학생


겨우내 꽁꽁 언 몸이 풀려갈 때쯤 찾아온 공간 이동의 시간.


나는 불현듯 늦여름 위에 서있다. 봄 내음도 맡지 못한 채 다시 가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오고 싶었고, 오게 되었으니.

 

드디어 찾아온 개강

아직 열기를 머금은 햇볕 아래, 학생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더할 수 없는 활기로 교정은 들썩였다. 

반갑다고, 오랜만이라고.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나도 교정 곳곳에 동일한 인사를 건네며 반가움을 표했다. 숲도, 이름 모를 새들 조차도 반갑고 또 반가웠기로. 이제는 방문객이 아닌, 학생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는 어깨너머로 마냥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 도서관에 당당하게 들어가도, 다리가 풀리도록 캠퍼스를 걸어도, 카페 한 구석을 독차지하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멜번에서부터 알던 친구 V와 그녀의 하우스메이트 C의 집에 들어간 덕에, 나는 빠르게 캔버라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V는 법학과 경영학 복수 전공, C는 법학과 아시아 문화학 복수 전공이었다. 복수전공 선택의 기회는 입학 성적에 따라 좌우되는데,  그중 V가 속한 법학 및 경영 복수 전공은 최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선택 사항이다. 똑똑한 친구라는 것은 이전부터도 알고 있었지만 학교에서 만나니 더욱 그녀의 진가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전액 장학금뿐만 아니라 방학 시즌마다 고향까지 왕복할 수 있는 비행기 티켓까지 학교에서  지원받고 있었다. 

 

함께 지낼수록 놀라웠던 것은, 이 두 친구 모두 예술적 감각이 탁월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학업 성적을 최상위권으로 유지하면서도 예술성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부모와 학교로부터 융통성 있는 지도를 받았다는 것이다. 수준급의 하프 연주 실력으로 시시때때로 한 곡조씩 뽑아내는 것이 V의 취미였다. 그녀는 시험기간에도 마이클 부블레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얼핏 보면 노는 것처럼 공부를 했다. C는 V보다는 학업과 생활에 있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였지만, 그런 면을 역으로 잘 계발한 덕에 일어를 포함한 4개 국어에 능통했다. 춤에도 소질이 있어 어릴 적 익힌 무용을 종종 즐겼으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때때로 친구들을 모아놓고 창작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정한 길에 접어든 후에 뒤늦게 예술 분야를 배우려 어려운 용기와 무리한 돈과 긴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상이한 그 모습에, 나는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왜 대다수의 한국 학부모들은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어느 연령대부터는 모든 것을 끊고 국영수에만 집중하도록 지도하는 걸까? 이곳에도 분명 대입과 졸업을 위한 석차가 존재하며 그 치열한 경쟁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2009년 세계 대학 순위 17위의 학교인데 아무렴. 그런데 앞뒤 양 옆을 살펴보아도, 이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교육학자도, 전문가도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 뿌리 깊은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몇 가지 사례만 가지고서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예술적 감성과 함께 성장하는 것은 학업에 도움을 주면 주었지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발달된 감성이 의식이라는 부표로부터 한 줄 한 줄 뻗어 내려가, 깊은 바다 속을 유영중인 ‘의지’를 수면 위로 건져내는 그물망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성향과 자질에 따른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과정을 거쳐왔기에 오늘 또 하루 나를 존재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문득, 감사하다.

내게 주어졌던 많은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중요한 순간마다 극적으로 엮어져 온 나의 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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