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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Feb 24. 2016

한 달을 울었다.

서울 #2. 상사병과 기적 



어느 곳을 가도, 친절한 은행 직원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사정은 알겠지만, 해외 대학으로 들어가는 학자금은 대출이 불가능해요.” 


날이 갈수록 국제교류센터 조교님은 답을 재촉해 왔다. 학기가 2월 23일에 시작이라니 1월 안에는 답을 드려야 했다. 설탕이 다 떨어져 가는 솜사탕 기계 노즐에다 젓가락을 휘휘 돌려 대는 것 마냥, 나는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 같은 것들을 머릿속에서 억지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말에 시간표까지 적힌 수학 허가서를 전달받자, 나의  온몸엔 헬륨가스가 차 올랐다. 가느다란 정신줄만 놓으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모양새로. 


귀국 직전 캔버라에 머물면서 매일 같이 보던 그 하얀 건물이 머릿속에서 만져지는 듯했다. 크지 않아도 아늑했던, 햇살 가득한 미대 도서관과 깔끔한 교내 갤러리들, 그리고 널찍한 작업실도. 그 구석구석을 지나다니면서 '꼭 한 번 다녀보고 싶다' 생각했었다. 석사는 그 자리에서 퇴짜를 맞았어도, 이제 한 학기는 다닐 길이 생겼다. 이렇게 멍석이 깔려있는데도 단지 금전적인 문제에 떠밀려 다 잡은 기회를 놓아야 하는 현실에 너무나 속이 상했다. 내가 가진 자질들은 혹시 주인을 잘못 타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우울증이 찾아왔다. 혼자일 수 있는 모든  순간마다 웅크리고 앉아 울고 또 울었다. 놀기도 싫었고 일할 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둘둘 말아 꼬깃꼬깃해진  마음속으로, 불현듯 밀려들어오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너를 항상 믿는데, 넌 왜 나를 믿어주지 않니?’ 


아마도 마음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격언이나 설교 더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소 비뚤어진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내일부터 난 신경 끄고 걱정 안 할 테니까, 뭘 어떻게 해 보든가요!’ 


이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투정 부리며 던져버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더 이상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내 계정에 수상한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ANU에서 보낸 메일이었다. 학비를 낼 필요가 없으니 보험료 200불 정도만 내고 학기를 시작하라는 내용이었다. 일반적인 교환학생 처우를 받게 된 것이다. 분명히  지난번엔 학비가 고스란히 적힌 서류를 보내왔는데, 눈을 씻고 다시 읽어 보아도 학비를 면제시켜 주겠다는 말이었다. 결국은 본교 학비에 대한 국제교류 장학금을 받는 동시에 상대 학교 등록금은 면제 처리가 된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학기를 마치고 졸업하기까지 학교 관계자들을 피해 다녔다. 혹시나 나를 붙잡고, 행정 착오였으니 다시 학비를 내라고 할까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ANU의 성적처리가 본교 졸업대상자 전산입력 기한을 넘기는 바람에 8월 졸업이 무산되었음에도, 나는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2월, 못  본 지 오래인 학우들 사이에서 심히 어색한 모습의 졸업사진을 남겼다. 

꽤 소심한 마무리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때 나는 간절했었고, 

비밀에 부쳐진 기적은 그렇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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