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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Mar 03. 2016

런던에 속았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 런던의 유학생


공항에서부터 내리쬐던 찬란한 가을볕 탓에, 런던은 본디 이리 따사로운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을은 다급히 그 조명을 거두고 겨울로 이어지는 어둑한 구름 천막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빛 꺼풀이 벗겨진 이 오랜 도시가 굳은 표정으로 그 본연의 검붉은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나는 섬뜩함마저 느꼈지만, 내 안에 술렁이는 그 기류 위에 ‘상실감’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래선 안 된다고. 


학교도, (누구나 떠올리는 런던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시내도 모두 내 생각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길 위에 흩뿌려야 하는 것이다. 지하철과 기차를 매번 갈아타며 통학하려면 한 달 교통비가 그저 만만치 않은 정도로 끝날 리 없다. 결국 노선이 길더라도 버스를 타는 게 생존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차창 밖 풍경은 어디가 어딘지 모를 낡고 붉은 집들의 연속이다. 집집마다 쓸모없이 남겨진 굴뚝의 수를 몇 백 개쯤 세어야 내가 가야 할 어딘가에 도착한다. 가끔 마주 오거나 타고 내릴 때 잠깐 보고 마는 빨간 버스의 외관이, 매일 볼 수 있는 것들 중에는 가장 예쁘다. 


사람도, 도시도, 그 무엇이라도, 그를 부딪쳐 겪어보기 전까지는 내 안에서 실재하지 못한다. 언제나 허상을 먼저 붙잡고 있는 셈이다. 그것들은 대개 본 대상의 실제 모습에 입각하여 형성되지만, 쉬이 뒤틀리고 뒤섞여 본래의 그것과는 다소 상이한 무언가로 재탄생된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각을 거치면서 조금씩 변형된 파형으로 끝없는 표류를 하는 것이다. 숱한 첫인상들의 중첩 위에 때로는 특정 대상과 이해관계에 얽힌 주체들이 의도적 이미지—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를 덧입히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런던에 속았다는 말은, 

그저 가만히 이 자리를 지켜온 런던에게는 가혹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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