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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y 04. 2020

본디 춤꾼

자유를 찾아 나선 본디 몸치 탈출기

어디서 주워 들었다. 철학의 끝은 춤이라고.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기억을 해야 출처를 밝힐 텐데. 어디서 주웠는지 기억이 안 난다. 본래 의미와 부합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소화한 문장의 의미를 풀어보고 싶다. 천천히 추는 춤 ‘요가’를 시작했다. 이 정도도 몸을 움직여본 적이 없어 아직은 낯설다. 평생을 같이 해 온 내 몸인데 이 몸이 내 몸인가, 내 몸 중 이런 놈이 있었나 싶다. 느리게 추는 춤 요가를 시작하며 내 몸을 들여다보지 못한 시간들에 미안함을 시작했다. 잘 움직이지도 않고, 스트레칭으로 기지개 한 번 펴보지 못한, 빛 한 번 보지 못한 근육들이 기죽어 지냈을 생각에 미안하다.

요가 선생님의 시야에 닿을 듯 말듯한 애매한 위치를 선점한다. 어정쩡한 자리로 경쟁을 다툴 만한 자리는 아니지만 나 혼자 자리 차지에 열을 올린다. 맨 앞줄은 아니지만 맨 뒷줄도 아닌 자리. 중앙도 그렇다고 맨 끝도 아닌 자리를 고집한다. 자존심을 간신히 지키면서 자신감 가면을 슬쩍 쓰고 비장하게 수업에 입장한다. 그래 봤자 몸은 덜그럭 덜그럭, 낑낑 신음소리에 세상 초보자임이 금방 탄로 난다. 선생님의 레이더에 포착된다. ‘처음이니까 괜찮아요’와 ‘어랏, 이게 왜 안되지?’가 교차한다. 선생님의 생각이 가깝게도 들려온다. 따뜻한 눈빛과 흔들리는 눈빛이 묘하게 공존한다. ‘아. 갈길이 멀고도 험하구나’

아마 난 거의 몸치인 듯하다. 아니다. 몸치가 분명하다. 어렸을 때 어떤 모양을 따라 신체 동작을 따라 하는 테스트가 있었는데 하마터면 통과하지 못할 뻔했다. 예를 들면 오른손을 뻗고 왼발을 들고 고개는 이쪽으로. 이런 것들. 몸이 몸이 아니다. 내 몸은 아무래도 내 몸이 아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을 준비하며 아이들은 이리저리 모여 춤을 준비했다. 한 친구도 나에게 팀을 짜서 춤 연습을 하자고 제안했다. 별 무게 없이 함께할 수 있었지만 거절했다. 내 대신 멤버로 참여하게 된 친구는 무대 위 몸치임이 만 천하에 드러났지만 난 그 친구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같은 몸치인데 나는 숨었고, 친구는 무대 위에서 몸을 ‘움직였다’

남이 보든 보지 않든 어느 곳에서도 춤 한번 춰 본 적이 없다. 남이 춤추는 것을 보며 그이의 열망이나 갈망에 이입되어 울어본 적은 있는데 왜 내 몸으로 춤 한번 춰 본 적이 없을까. 잘생기든 못생기든 어느 모양의 춤 한 번 춰 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클럽이라도 가면 음악에 몸을 맡겨 춤을 출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저렇게 마음을 놓고 몸을 놓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 마음을 자유로이 둘 수 있는지 참 신기하다. 소망하는 세계다. 내 몸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만 같아 자꾸 몸과 마음이 어색해진다.

선생님은 아시려나. 요가 클래스 동료들은 알고 있을까. 요가를 시작한 계기가 건강과 체력을 찾아 나선 생활인의 여정이 아닌 자유를 찾아 나선 어느 구도자의 추구라는 것을. 캬. 과연 그 철학의 끝에 당도할 수 있으려나. 철학은 개뿔. 내 발가락이, 내 무릎이, 내 어깨가 왜 내 맘대로 안 움직이는 거냐고! 혹시 운동신경과 관련이 있다는 그 뇌. 나 뇌에 문제 있는 건 아니겠지?

열한 살 꼬마가 버스에서 춤을 추었던 그 날. 그 날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정확히 머리끝에서 가슴까지, 끊어지도록 흔들어댔다. 운행 중인 버스, 안전 관리에 소홀했던 그 시절.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던 내 인생 자유로웠던 딱 한 순간. 그 후, 구부러진 몸을 펴는 중이다. 구겨진 마음도 펴고 생각도 다림질 중이다. 그렇게 나는 자유를 찾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엣지 있는 몸짓이 아니더라도 내 몸이면 충분하다. 내 몸짓이면 충분하다. 이후로 지금까지 이어지는 내적 외침 “나는 사실 자유를 잃어버린, 본디 춤꾼이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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