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준 Jan 18. 2016

#060.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감독이 묻는다. 과연 인간은 나약한 존재인가?




1. “금광도 석유도 발견되기 이전의 시기이지만 이미 아메리카 대륙은 거대한 용광로였다. 미국, 캐나다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유럽 사람들이 모피 사냥을 위해 미국으로 유입됐다. 사냥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강간하는 등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원주민과 유럽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했다. 야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이 흥미로웠다. 나는 이런 곳에서 불행하게도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시작이 아닌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2. 사실 "이냐리투" 감독은 자신의 전작들에서 어떤 상황 속에 놓인 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져왔다. 그리고 전작 <버드맨>(2015)에서는 "리건 톰슨"(마이클 키건 역)이라는 퇴물 배우의 모습을 통해 어떤 몸부림을 표현해 냈던 바 있었다. 이번 작품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의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작품의 주인공인 "휴 글래스"는 전에 없이 더욱 잔혹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 모습을 통해 "이냐리투" 감독은 그 동안 계속해 온 자신의 질문에 대한 영역을 대자연이라는 광대한 대상에까지 확장시킨다.

3.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북미의 모든 언론과 평단의 관심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특히 "이냐리투" 감독과 함께 <버드맨>(2015)을 연출하면서 지난 해 아카데미를 수상한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 감독의 극사실주의적 영상들은 그의 전작인 <그래비티>(2014)의 장엄함이 그대로 옮겨와 있는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대단했다. (실제로 "엠마누엘 루베즈키" 촬영 감독은 현재 가장 주목받는 촬영 감독 중 한 명이며, <그래비티>와 <버드맨>으로 2년 연속 오스카를 수상한 바 있다.) 이는 분명 그의 능력이 탁월히 발휘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전작 <버드맨>에서 "이냐리투" 감독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것이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4. 배우들의 연기 또한 영화를 완성시키는 하나의 축으로서 활용된다. 특히 작품에서 갈등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톰 하디" 두 배우의 연기는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관념들을 별 다른 대사 없이 스크린에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톰 하디"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인셉션>(2010)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이후에 그가 보여주고 있는 연기의 스펙트럼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새로운 영역의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5. 다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영화 속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대로 영화 속 "디카프리오" 역시 충분히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다. 그런데 나는 소름마저 돋던 영화 속 장면들에 비하면 그의 연기에는 기대보다 큰 점수를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연기는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다만 나는 "디카프리오"라는 배우가 이 정도 연기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6. 이 작품에서 그의 연기가 도드라져 보이고 인상에 깊이 각인 되는 것은 "디카프리오"라는 배우가 전에 없던 미친듯한 연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주어지는 상황들이 너무나 극한에 치달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황들을 잘 소화해낸 것 역시 그의 몫이며 능력이지만, 이미 이야기 했듯이 그는 이전의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자신이 이 정도 연기는 가능하는 것을 보여준 적이 분명히 있었다. 연기적인 측면만 따지자면 개인적으로는 그의 전작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4)의 마지막 연기가 더 인상 깊었으며, 이번 작품 <레버넌트>를 통해서는 그의 그런 연기력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뿐이다.

7. 이 영화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사건의 단초가 되는 것은 회색곰에게 공격받아 사경을 헤메게 되는 "휴 글래스"이지만, 그 이전에 그의 아들인 "호크"(포레스트 굿럭 역)의 존재는 정황상 잠재적인 문제점이며, 실제로 "글래스"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 "피츠 제럴드"(톰 하디 역)를 향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실제로 인디언 어머니와 "글래스" 사이에서 태어난 "호크"는 동료 사냥꾼들, 특히 "피츠제럴드"의 백인우월주의에서 비롯된 혐오감에 공격받는다. 어쩌면 "호크"를 향한 그런 시선들은 그의 아버지인 "글래스"를 향한 비아냥거림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토속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자식마저 낳은 "글래스"의 모습이 그들에게 그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8.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7번의 내용이 조금 더 뚜렷하게 표현되지 않았던 점이 아니었나 싶다. 관객들은 대부분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초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어림짐작이기는 하지만 이는 북미의 관객들이라고 할 지언정, 당시 인물들이 갖고 있던 순혈주의 혹은 인종차별 등의 관념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인 "글래스"와 그의 아들 "호크" 두 사람의 연결고리 혹은 특수한 관계에 대한 설명이 다소 모호한 것은 이후에 "글래스"가 "호크"의 죽음을 목격하고 복수를 다짐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데 있어서도 그 감정선의 연결을 다소 느슨하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부성애'라는 단어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론 조금 아쉽다. 특히 "글래스"의 목숨을 살려 준 원주민이 자신의 딸을 잃어버리고서도 신의 뜻으로 이해하는 장면과 비교한다면 그가 유독 "호크"의 복수에 대해 매달리고자 했던 이유가 특정되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9. 더 나아가 "글래스"와 그의 아들 "호크"의 관계와 "호크"의 죽음을 목도한 "글래스"의 절망감은 영화 내내 그가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험한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결코 복수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되기에 더욱 중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과연 "글래스"라는 인물이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꿈꾸었더라도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면서까지 "피츠제럴드"를 쫓으려고 했을 것인가? 라는 것. 그가 겪어낸 모든 상황들이 스크린에 표현될 때마다 관객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반응을 쏟아냈으니 결국 그의 동인이 "아들의 복수"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면 진작에 영화는 끝나 버리고 말았을 지도 모르겠다.

10. 그 동안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인물 "브리저"(윌 폴터 역)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야겠다. 어쩌면 그는 "글래스"와 "피츠 제럴드" 사이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을 해야하는 인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는 "피츠 제럴드"에게 속아 "글래스"를 버리고 떠난 인물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그에게도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신도 그런 부분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츠 제럴드"와 함께 당도한 마을에서 생존자를 만나고도 모른 척 해주었던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일종의 고해이자 자책. 다만 대장인 "헨리"(돔놀 글리슨 역)를 만나 진실을 이야기 하지 못한 것은 "피츠 제럴드"라는 인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약속된 금액을 거절하는 것 정도였으리라.

11. 영화는 광대한 자연과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서 끌어다 온 "신"이라는 영적 존재에 대한 언급도 놓지 않는다. 특히 "글래스"와 "피츠 제럴드"는 "신"이라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부분에 있어서도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자연(신)의 순리대로 인간이 행동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있는 "글래스"와는 반대로 "피츠 제럴드"는 어차피 신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할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 한다. 어쩌면 자연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부터 드러나는 차이가 토착 원주민을 이해하고자 하는 "글래스"와 그렇지 않은 "피츠 제럴드"의 다른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12.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휴 글래스"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정면 타이트 샷으로 그의 얼굴을 단단하게 잡아낸다. 그리고 그 카메라 너머로 관객들을 흔들림없이 응시하는 그의 두 눈동자.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아들이 복수에 대한 강한 집념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대자연 앞에서 한 없이 나약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인간일지라도 의지를 갖고 버텨낸다면 결국에는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인류가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몸뚱아리는 너덜너덜해져 버렸을 지 몰라도 "휴 글래스"의 정신은 똑똑히 살아 남았음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059. 그 날의 분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