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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Mar 06. 2016

#069. 대니쉬 걸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의 경외로움.



00.


이 영화 <대니쉬 걸>이 개봉한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보통 이렇게 타이밍을 놓쳐버린 경우에는 혼자 기록을 남겨두거나 마음속에 묻어두는 것으로 작품을 보내고 말지만, 이 영화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를 영화관에 앉아 관람한 것만 벌써 4번. 최근 몇 년 동안 한 작품을 이렇게까지 파고들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영화는 스크린을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모든 순간은 거미줄처럼 서로를 끈끈하게 끌어당기고 있고, 그 위를 굴러다니는 이슬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매년 두어 편 정도의 작품이 마음속 깊은 곳에 깊게 자리하게 되는데, 최근에 가장 좋아했었던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 <뷰티 인사이드>(2015)의 계보를 이을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01.


사실 "톰 후퍼" 감독은 자신이 걸어온 길만큼 이름을 널리 퍼뜨리지는 못한 인물이다. 그의 경력에 비해 직접 연출한 영화 작품 수가 적은 까닭이기도 한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필모그래피 초반부의 10년 이상을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을 통해 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킹스 스피치>(2010)를 통해 아카데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다음 작품 <레 미제라블>(2012)까지 연달아 인정받으며 단숨에 알려지게 되었다. "톰 후퍼" 감독의 작품들에는 전체적으로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고 있다. 먼저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문학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은 그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두 번째 작품의 모델로 선정한 영국 소설가 "조지 엘리엇"에서부터, "엘리자베스 1세", "존 아담스", "조지 6세", "더비 카운티", 그리고 이번 작품의 "아이나 베게너"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에는 진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물론 "장발장"의 경우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지만,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자,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잘 그려져 있는 작품이 아닌가.) 다른 한 가지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잘 표현해 낼 줄 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주연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스크린에 그려내고 있으니 그가 연출한 어떤 작품을 선택하더라도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1) "조지 엘리엇"은 영화 <다니엘 데론다>(2002), "엘리자베스 1세"는 영화 <엘리자베스 1세>(2005), "존 아담스"는 영화 <존 아담스>(2008), "조지 6세"는 영화 <킹스 스피치>(2010)에서 만나볼 수 있다.


<대니쉬 걸> 촬영 현장의 "톰 후퍼" 감독.


02.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영화 <세비지 그레이스>(2009)에서 "줄리안 무어"의 분위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던 "에디 레드메인"이라는 배우가 <레 미제라블>에서 조국을 위해 투쟁하는 한 청년으로 거듭날 때까지만 해도 그가 이처럼 압도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한 작품 속에서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대배우들의 아우라에 묻히지 않을 정도의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라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지난 작품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에 이어 이번 작품 <대니쉬 걸>에서 "에디 레드메인"이 보여주는 연기력은 찬사를 보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 다소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그가 보여주고 있는 연기는 마치 "히스 레져"의 전성기 시절을 보는 듯 캐릭터와 동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고 마는 장면은 그의 모습에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고 만다. 그리고 이런 포인트들에서 "혹시나.." 하는 불안한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히스 레져"의 마지막이 그랬던 것처럼.


2) 영화 <세비지 그레이스>는 "줄리안 무어"와 "스테펀 딜런", 그리고 "에디 레드메인"이 함께 출연한 작품으로, 엄마인 "바바라 베이클랜드"(줄리안 무어 역)와 아들 "안토리 베이클랜드"(에디 레드메인 역)의 위험한 관계를 그려내는 작품이다. 이는 최초로 합성수지를 발명해 낸 베이클랜드 가문의 실화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03.


영화는 Universal과 Working Title Films의 오프닝 로고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흘러나오는 Alexandre Desplat의 The Danish Girl이라는 이 작품의 메인 OST는 스크린에 본 영상이 투사되기 이전 시점에서부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최근에 많은 작품에서 오프닝 타이틀 컷이 시작되기도 전에 영화의 분위기를 전달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잘만 이용한다면 이른 시점부터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은 모두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이나 베게너"(에디 레드메인 역)와 관련된 장면이다. 그가 태어난 곳, 그리워했던 고향,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던 무덤까지. 물론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들에게 이 부분들이 이해될 리 없다. 감독 역시 그런 것을 원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영화가 끝난 뒤에 이 시작 지점을 반추해 볼 수 있다면, 이 영화의 시작은 전체 내용에 대한 적절한 복선이자 프롤로그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최근에 개봉한 <데드풀>의 경우에는 오프닝 타이틀에서 마지막 쿠키 영상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태도로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이는 영상의 시작과 끝이 영화 한 편이었던 과거의 틀을 깨고, 이제는 관객이 영화관에 앉은 그 순간부터 자리를 떠나기 직전까지의 모든 과정이 한 작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물론, 영화관이 "무료로 제공"하는 사전 광고 부분은 제외한다.


04.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장면들이 모두 지나간 뒤에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아이나"의 아내 "게르다 베게너"(알리시아 비칸데르 역)의 얼굴을 크게 조명하는 Full Shot 시점과 함께 시작된다. 이 장면에서 "게르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미묘한 감정을 전달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앞서 등장했던 배경 장면들을 포함하여 여기 이 시점의 "게르다" 표정까지가 이 작품 전체를 비추는 프롤로그와 같은 장면이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야기를 진행해가면서 반복적으로 하게 될 말이겠지만, "게르다"는 모든 순간을 자신의 삶에 흔들려하는 "아이나"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봐 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등장한 "아이나"의 일생과 비견할 수 있을 법한 하이라이트 장면을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다.


"게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나"의 모습을 지켜봐 주는 인물이다.


05.


이 작품을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관객들 모두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에 대한 부분만큼은 정확히 짚어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과연, "아이나"라는 인물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부분은 언제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또한, 그의 성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은 선천적인 요인에서 시작된 것일까, 후천적인 요인에서 시작된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등장하는 "아이나"의 모든 행동들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실제 인물을 모델링하여 각색된 작품이기에 실제적인 사실과 관련한 시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라는 장르로 넘어온 이상 작품 속의 "아이나 베게너"라는 인물을 재해석하는 데 있어 그것이 족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써 내려감에 있어 "아이나"라는 인물의 성 정체성은 선천적인 요인에 의해 발현된 것이며, 그것을 처음 깨닫게 해 준 인물은 "한스 악스질"(마티아스 쇼에나에츠 역)이며 이후 "게르다"의 제안에 의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는 해석을 하게 될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늪은 언제나 내 안에 있거든..


06.


이 영화에서 "아이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장면은 "게르다"의 부탁으로 인해 여성 스타킹을 신게 되는 장면이지만, 그 외에도 이미 여러 장면들을 통해 그 자신도 모르는 내재되어 있었을 여성성에 대한 암시는 계속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울라 폴슨"(엠버 허드 역)을 처음 조우하게 되는 장면에서 수많은 발레복들 사이로 그녀를 몰래 숨죽여 지켜보던 그의 시선, 화장대 앞에서 급히 화장을 고치는 "게르다"를 훔쳐보던 시선이 바로 그것. 특히 이 두 장면은 그렇게 지켜보는 "아이나"의 모습을 제 3자의 눈으로 지켜보는 듯한 앵글로 표현해 냄으로써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아이나" 역시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듯한 "톰 후퍼" 감독이다. 반면, 외출 후 돌아와 "게르다"가 자신의 신발끈을 푸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은 "아이나"의 시선으로 클로즈 업 되어 잡히는데 이 때는 앞서 두 장면과 반대로 자신이 그런 모습을 좋아한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런 카메라 워킹과는 상관없이 이 모든 장면들은 "아이나"가 여성성에 대한 어떤 동경과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07.


하지만 "아이나"가 처음부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밝혔듯이 그의 성향은 기본적으로는 선천적인 것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는 사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장하는 과정에 있어 스스로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학습해 왔던 것이다. "폴슨" 대신 스타킹을 신어 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응하면서도 차마 드레스까지는 입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성의 드레스를 남성이 입는 것은 그 시기의 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지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모습 하나가 표현된다. "아이나"가 스타킹을 자신의 발에 씌워 말아 올리기 시작할 때, 그의 시선이 자신의 발에서 스타킹의 재질로 옮겨가는 장면. 바로 그 장면이 처음으로 성인이 된 "아이나"가 자신 속의 "릴리"에게 눈 뜨게 되는 장면이다. 대상의 '발'을 쳐다보는 것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고 반대로 '스타킹의 재질'을 느끼는 것은 여성의 섬세함을 구체화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장면에서 분명히 "아이나"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릴리"를 인지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내면의 "릴리"를 만나게 되었다.


이 장면에서 "아이나"는 내면에 존재하던 "릴리"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08.


이후 "아이나"가 "게르다"의 새로 산 속옷에 관심을 보이고, 더 나아가 그 속옷을 직접 입고 있는 것의 의미는 앞서 언급한 내면 속 "릴리"가 적극적으로 표출되는 첫 장면이기도 하지만, 그런 계기를 만들었던 아내 "게르다"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게르다"는 그런 그의 모습에 약간 놀란 눈치이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모습이다. 앞서 그가 자신의 부탁에 기꺼이 여성 스타킹을 신은 행동의 연장선 상에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그녀는 그의 진심을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단 한 순간도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역시 시대의 상황과 함께 해석되어 성전환과 같은 욕구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이후에도 "게르다"는 "아이나"의 그런 비슷한 요구들에 손쉽게 장단을 맞춰주고 만다. 하지만 그 행동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그런 결과를 낳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게르다"의 행동은 분명히 다르지 않았을까?


여자들은 익숙하지만 남자들은 타인의 시선을 불편해하죠. 일단 받아들이면 즐기게 되지만..


09.


"아이나"가 "릴리"로 변장을 하고 나타난 파티에서 그녀는 "헨릭 산달"(벤 위쇼 역)을 만나게 되고, 그와 키스를 나누게 된다. 이 장면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야기를 잠시 앞으로 되돌릴 필요가 있겠다. 앞서 "게르다"는 자신의 초상화 모델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여자들은 익숙하지만 남자들은 타인의 시선을 불편해하죠.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즐기게 되지만.." 그녀의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영화가 다소 진지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이 장면에 등장하는 고양이를 이용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 짧은 문장 하나는 지금부터 등장하는 "릴리"의 모든 행동과 그 의미를 함께 한다. 다시 파티 장면으로 돌아와서 "헨릭 산달"이 그녀에게 접근하기 전까지 "릴리"의 겉모습은 여성과 같지만,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어색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나"는 아직 "그"일 수밖에 없다. 이후에 "게르다"가 작가로 성공하고 난 이후에도 "아이나"는 사람들의 앞에 등장하기를 꺼려하는데 그 역시 같은 이유로 해석할 수가 있다. 단, "한스"와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릴리"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나타나는데 이 장면에서야 비로소 "아이나"가 "그녀"로 불릴 수 있게 된다.


10.


"헨릭 산달"과의 키스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수 있지만 나는 이것이 개인적인 호감, 즉 이성에 대한 욕구라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나"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흔들리고 있다. "게르다"와 함께 있을 때는 아직까지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아이나"라는 인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자신 내면에 있는 "릴리"의 모습을 확인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헨릭"이 그의 앞에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행위 도중 "게르다"의 출현과 함께 그는 다시 사회적 의미의 "아이나"로 돌아오게 된다. "게르다"가 자신의 아내라는 이야기는 결국 자신 역시 누군가의 남편(남성)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며, 그런 자신이 다른 남성과 키스를 나누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심리 가운데 "아이나"는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점차 깨달아가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나"는 "폴슨"의 연습실에 있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감추어가면서까지 여성으로서 표현될 수 있는 자신의 몸을 관찰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가진다. 하지만 그 확고함이 자신이 여성이 되고자 하는 것과는 아직까지 거리가 있다. 아직은 아니다.


"헨릭"과의 키스가 사랑의 감정이라 단정지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11.


그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알아가는 동안 "게르다"는 그동안 자신이 그려왔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내는) 초상화를 그만두고 처음으로 상상 속 "릴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말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떠났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이나"를 떠나보내기 위해 "릴리"를 그렸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나"는 그런 "게르다"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직까지 어떤 여지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아이나"는 자신의 특별함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의 "아이나"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고, "게르다"는 그가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그린 "릴리"의 그림들로 태어나 처음으로 평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이러니하다.


12.


물론 처음에는 "게르다" 역시 그런 그의 모습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수많은 병원을 수소문해 다니고 또 설득한다. 물론 이것을 자신의 남편인 "아이다"를 지켜내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게르다"가 "아이다"를 이해하고 있는 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해야겠다. 반대로 그런 "아이다"의 모습에 슬퍼하지만 아무런 말 없이 따라주는 "아이다"의 모습 또한, 그에게 여전히 현실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아이다"이기에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게르다"는 계속해서 "릴리"의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릴리"를 완전히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이야기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딱 그만큼의 간극이 언제나 벌어져 있었고, 그 간극 사이로 "한스"라는 인물이 개입하게 된다.


13.


"게르다"가 "한스"라는 인물을 찾아간 것은 그런 이중적인 심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이나"를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과 "릴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한스"라는 인물을 찾아가는 것은 병리적인 차원의 수준을 떠나 "아이나"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남자를 남자로 되돌리기 위해 다른 남자를 찾아가 구원의 손길을 부탁하는 것. 다만 "한스"와 함께 돌아온 집 안에 "아이나"가 "릴리"로 바뀌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게르다"는 그동안의 모든 행동이 부질없는 행동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이 욕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어.


14.


"한스"야말로 "릴리"를 있게 한 장본인이었음이 밝혀진 뒤, "게르다"와 "릴리"는 처음으로 한 침대에서 밤을 맞이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게르다"에게는 "릴리"라는 인물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이자, "아이나"에게는 진짜 "릴리"가 되고자 하는 강한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많은 부분들에서 "게르다"에게는 "릴리"가 아닌 "아이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후 "게르다"의 전시에 나타나지 않았던 릴리로 인해 "게르다"는 그동안 표현하지 않았던 모든 서운함을 폭발시키고 만다. 이 장면 전까지의 "아이나"는 두 사람("아이나"와 "릴리") 모두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아이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프랑스로 건너 와 "게르다"의 첫 전시가 열렸을 때 "아이나"가 함께 했던 것과 상황이 달라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에 좌절한 "게르다"가 "한스"에게로 떠나고, "릴리"는 뒤늦게 화장을 지우고 "아이다"로 되돌가보려 하지만, 그에겐 이제 "릴리"의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


이 날 밤 이후 두 사람은 "릴리"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한다.


15.


영화 속에서 온전한 "릴리"가 되지 못한 "아이나"의 삶은 언제나 어둡게 묘사된다. 자신이 동경하는(이것은 처음에 등장해 "울라 폴슨"의 모습을 엿보았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여성의 모습을 찾아다니기 위해 뒷골목의 향락가를 전전하고, 누구를 만나 사랑을 하는 것조차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만 한다. 계속해서 언급되었던 부분이었던 것처럼 이 모든 행동들 역시 당시의 사회적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동안 표현되었던 것들이 그런 사회적 시선, 행동 양식들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었다면, 이제 등장하는 '공원에서의 린치 장면'과 '구속복을 들고 걸어오는 의사의 행동' 등의 장면들은 "릴리"라는 존재를 사회적인 시선으로 직접적인 조명을 하는 부분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표현들을 통해 "톰 후퍼" 감독이 <데니쉬 걸>이라는 작품은 "아이나 베게너"라는 인물이 가지는 작품의 특수성을 벗어나 보편성까지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16.


어느 날 아침, 결국 "게르다"는 "릴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 말속에는 그동안 그녀가 느껴왔을, 그리고 입 밖으로 꺼내면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져야만 할까 봐 감출 수밖에 없었던 모든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릴리"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은 그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세를 얻었고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이전에 결정적으로 스타킹을 신기지만 았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아마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게르다"에게는 사회적인 성 역할의 시선을 떠나 "릴리"를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가 하나 있다. 그녀가 "아이나"의 아내이기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 그녀는 "릴리"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 "아이나"를 반드시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모든 미련을 버리고 "릴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것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에요.


17.


영화는 이제 모든 갈등을 봉합하고 "아이나"가 온전한 "릴리"가 되어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어느 때보다 "릴리"의 모습과 그 내면을 밀접하게 묘사한다.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모든 것은 "릴리"의 시선에서 그려지기 시작한다. 처음 "워네크로스 박사"(세바스티안 코치 역)를 처음 만난 "릴리"는 수술의 모든 부작용에도 그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로 강한 의지를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 장면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런 "릴리"를 바라보는 "게르다"의 감정선. 이 수술로 인해 남편("아이나")을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박사의 말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여기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이야기는 이 수술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무조건 성립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18.


그렇기 때문에 "릴리"와의 마지막 키스를 마치고 의연하게 뒤돌아서는 "게르다"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녀에게 이 키스는 "릴리"의 미래를 축복하기 위한 행위이자, 자신의 동반자였던 "아이나"를 보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 역시 키스가 끝난 뒤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만 이 장면은 누군가와의 이별을 직시하는 태도를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뒤돌아 설 수 있었던 것에는 자신의 "아이나"를 되찾기 위해, 또 곁에 남겨두기 위해 했던 그 수 많은 노력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것이 결국 우리의 운명이었을 것이라는 아주 가벼운 말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연정을 그렇게 쉽게 흘려보냈는 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이별을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 "아이나"를 만날 수가 없다.


19.


수술이 진행되면서 "릴리"는 이제 자신의 미래를 조금씩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여성이 되기를 바랬고, 지금은 수술을 통해 육체적으로 여성이 되기를 바라고, 이후에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누군가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누군가와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된다면, 나는 꼭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릴리"라는 인물이 원하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모습이 변해감에 따라 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인지, 아니면 맹목적으로 여성이 되고 싶어한 한 인물의 과도한 욕심인지에 대한 시선을 말이다. 사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굉장히 애처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녀가 원하는 진짜 여성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미래에서 오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만 같은 그런 안타까움이 느껴져서 말이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 때문에..


당신은 정말 큰 힘을 가졌어.


20.


이제 마지막이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릴리"는 "게르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당신은 정말 강한 힘을 가졌어."라고. 어쩌면 영화 내내 "게르다"가 "릴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같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였다. 또 "아이나"("게르다"에게는 "릴리"가 "아이나"일 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또 "아이나"로써 존재해야만 한다.)가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게르다"는 늘 있는 그대로를 지켜봐 주었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게르다"가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표현되었던 부분과도 의미가 연결된다. 누군가의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캔버스에 옮겨다 그리는 초상화. 그런 그림들을 그려왔던 "게르다"이기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21.


영화는 "릴리"의 무덤 앞에서 "게르다"와 "한스"의 모습을 조명하며 끝이 난다. 아마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등장했던 그 장소와 동일한 장면이며, 앞서 똑같은 장면에서 흘러 나왔던 그 때의 그 곡, Alexandre Desplat의 The Danish Girl이다. 그리고 "게르다"는 그녀의 묘 앞에서 마지막 키스를 하며 건넸던 스카프를 하늘로 떠나보낸다. 그런데 어쩐지 그 행동이 그녀를 잊겠다는 의미보다는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치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 지붕 위에 올라 초혼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말이다.


"게르다"는 "릴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22.


정말 길었다. 만약 이 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었다면 나는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상황적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받아들이고 또 벗어내는 작업들을 몇 년째 계속 하고 있기에, 의외로 가슴 깊숙히 자리하는 작품들은 매년 몇 편이 되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 <대니쉬 걸>은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 지금껏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을 정도로 마음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사회가 소수자들에 대해 관대한 시선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성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소하고 이해가 모자라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이토록 마음이 깊게 전달되는 것은 분명 이 작품 <대니쉬 걸>이 "관계"에 대한 시선을 잠시도 떨어뜨리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잠시도 숨을 쉬지 못 할 정도로 모든 순간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또 그만큼 섬세하다. 그 복잡한 감정들을 단 한 번의 조급함이 없이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있으며, 반대로 넘치치도 않는다. 또한 현실에 흔들리는 "아이나"와 그를 지켜보는 "게르다", 두 사람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두 사람의 마음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아직 이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당신께 온 마음을 다해 추천하고자 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경외스러운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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