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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17. 2016

#073. 해어화

꽃을 피워내기는 했으나,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었던..




01.


영화 <건축학개론>(2012)이 한바탕 화제를 불러 일으킨 이후, 롯데엔터테인먼트(이하 롯데)가 배급에 나선 한국 영화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쉬움을 남겼다. 흥행 성적을 기준으로 300만 명 선을 끊어 봐도 <더 테러 라이브>(2013), <역린>(2014), <해적>(2014) 그리고 <타짜 : 신의 손>(2014) 정도가 겨우 손에 꼽힌다. <건축학개론>이 개봉했던 2012년을 기준으로 지금까지 롯데에서 배급한 한국 영화는 약 50여 편 정도. 매년 한 편 정도의 텐트폴을 세우는 전략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가기에는 화제를 모으기만 했던 <몬스터>(2014), <경성학교>(2015), <협녀, 칼의 기억>(2015), <서부전선>(2015) 등의 작품들의 몰락에 큰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흥행 성적이 그 작품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은 작품성에 있어서도 그리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롯데가 선택한 그 다음 작품은 "한효주", "천우희" 주연의 <해어화>라는 작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 제대로다. 롯데가 최근 몇 년간 선택한 작품들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1) 위의 자료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2) 텐트폴 영화 : 한 배급사의 라인업 작품들 가운데 확실히 흥행할만한 작품, 그래서 다른 작품들의 손실까지도 채울 수 있는 작품을 일컫는 용어.


02.


이 작품이 롯데에서 선택한 작품이라는 것과 별개로 바로 지난 해에 <협녀 : 칼의 기억>(2015)을 연출한 "박흥식"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은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 두 작품은 외적인 차이점을 논하기 이전에 드라마의 구성에 있어,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완성도' 자체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어떻게 한 감독이 1-2년만에 이렇게 다른 작품을 내 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가 이번에 연출한 작품 <해어화>는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는 의미로 '예인'이 되고자 했던 한 여인을 비유하는 말이다.


어느새 "윤우씨" 하는구나?


03.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섬세함'이다.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드라마적 구성 요소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캐릭터들의 내면적인 심리가 외적으로 친절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는 점이 일부 관객들에게 아쉬움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뛰어 넘어버리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력과 작품에 이용된 모든 요소들에 부여된 의미들의 긴밀한 연결은 작품의 매력을 오롯이 전달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그 중에서도 "윤우"(유연석 역)의 소식을 들었냐며 물어오는 "연희"(천우희 역)에게 말로는 모른다고 하면서 꿈틀거리는 눈썹 하나로 자신의 감정을 내비추던 "소율"(한효주 역)의 모습은 그 서늘함에 기나긴 여운을 남긴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주인공인 "소율"의 시선과 심리를 따라 진행되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심리를 이해하고 몰입할 때 가장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물론 스크린에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소율"이 아닌 다른 두 인물인 "연희"와 "윤우"의 마음까지 헤아려 본다면 영화 속 곳곳에 표현되고 있는 다소 과장된 몸짓에도 녹아들고 말 것이다.


04.


영화의 인트로 부분에서 어린 시절 서로를 처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처음부터 경성 최고의 기생 학교인 '대성권번'에서 타고난 창법과 뛰어난 외모로 최고의 예인이 될 것이라 여겨지던 "소율"과 달리, 아버지의 빛 때문에 엽전 다섯 냥에 많은 이들의 눈 앞에서 권번에 버려져야만 했던 "연희"의 비참한 모습. 그런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던 "소율" 덕분에 두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동무'가 되고, 훗날 '대성권번'을 이끌어 가는 최고의 '일패'가 된다. 이 영화 <해어화>에서 발생하게 되는 모든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 곳에 있다. 영화는 "소율"과 "연희"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절친한 동무'로 포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동등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연희"의 입장에서는 권번에서 필요로 하는 '정가'에 있어서는 타고난 "소율"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언제나 그녀의 그늘에 가려져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율"에 의한 그 그늘은 "연희"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 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고마움과 별개로 자신의 존재감과 자존감의 측면에서 말이다.


3) '권번'은 기생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불리며 노래와 악기는 물론 궁중 무용과 민속 무용을 모두 망라하여 기생들에게 전수한 뒤, 그들을 다방면에 뛰어난 예인으로 길러냈다. 영화의 시대가 되는 1940년대에는 '한성권번', '한남권번', '조선권번',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대성권번'이 조선을 대표하는 '권번'이었다고 한다.


"연희"는 언제나 "소율"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05.


실제로 위에서 설명한 "소율"에 대한 "연희"의 그런 모습은 어린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든 장면에서 "연희"가 "소율"의 한 발짝 뒤에 위치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연희"의 그런 자존감은 비단 '정가'에 대한 재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 그녀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순수한 사랑까지를 "연희"는 하고 있었다는 점, 기녀로서의 마음이 아닌 여자로서의 마음, 그리고 같은 '일패'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권번'에서 중요한 무대에는 항상 그녀가 선택된다는 점 모두 포함한 "소율"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것이었기에, 두 사람이 열렬히 사모했던 "이난영"이 그녀에게 무대를 청할 때에도 지목된 이가 자신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소율"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만다.


06.


그렇게 그 시대 최고의 대중가수 "이난영" 선생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연희"는 곧 "연우"로부터 정식 가수 데뷔를 제안 받게 된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율"의 그늘이 아닌 곳에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눈 앞에 둔 "연희"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평생을 경생의 최고 예인으로 함께하자던 '유일한 동무'와의 약속을 깨고, 평생 한 번도 떠나본 일 없었던 '권번'을 등 돌릴 결심을 한 것은 그녀가 그만큼 절실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처럼 다가온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얻게 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 앞에서 이성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예인의 모습으로는 타인의 행복을 위해 나를 버려야 했고, "연희"의 동무로는 둘 사이의 평안한 관계를 위해 한 발 물러서야 했던 그녀의 인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윤우"의 사랑을 갈구했던 것 역시 단순한 치정, 혹은 "소율"에 대한 배신 정도로만 치부하기 힘든 것이다.


07.


"연희"라는 인물이 그렇게 '정가'를 버리고 "소율"과 '권번'을 떠나면서 영화는 '정가'와 '가요(유행가)' 두 가지 요소를 영화의 중심으로 옮겨다 놓는다. 이 작품 <해어화>에서 이 두 가지가 중요한 소재로서 다루어 지는 것은 1940년대의 역사적 배경을 상징하는 것 이상으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단순히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두 사람의 갈등을 유발하는 촉매제로만 작용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가'와 '가요'는 이 영화에서 각각 "소율"과 "연희"라는 인물을 대변하는 소재로서 '시대를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이'와 '지나간 세월의 재능을 가진 이' 사이의 내러티브를 비유적으로 이끌어낸다. "소율"이라는 인물이 대표하는 '정가' 역시 시대를 완전히 벗어난 재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 막 대중의 인기를 얻기 시작하며 그 세가 확장되어 나가는 '가요'에 비하면 일제 강점기 하에서 특정 권력 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성을 잃어가는 재능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권번'을 막 떠난 "연희"가 자신의 재능 '가요'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자유로운 꿈과 이상을 펼쳐 나가는 것과 반대로, "일본 경무국장"(박성웅 역)에게 몸과 마음을 받쳐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소율"의 모습 역시 그를 대변해 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 소재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재능'이라는 것이 결코 타고난 기술만으로는 그 빛을 발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냉철하게 조명하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4) 정가 : 바른 음악이라는 뜻으로 가곡, 가사, 시조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전통 가곡 중 하나로 청아한 소리가 특징이다.


"소율"은 정무국장을 만나고 온 뒤에서 "윤우"에게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08.


"소율"이라는 인물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 전에 "윤우"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이 작품에서 다소 불친절하게 표현되는 부분들이 몇 군데 있다면, 이 "윤우"라는 인물이 왜 두 사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 가장 먼저 손꼽힐 지도 모르겠다. 나는 "윤우"라는 캐릭터의 심리를 그의 어머니로부터 찾고자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대성권번'의 선생이자 권번장이었던 "산월"(장영남 역)과의 대화를 잠시 보면, 그의 어머니 역시 기생 출신임을 유추할 수 있다. 처음에 "소율"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이유는 어릴 적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가장 닮아 있었던, 어쩌면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아이가 그녀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미래와 가장 부합하는 인물 "연희"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개인적으로는 "윤우"와 "연희" 두 사람이 처음 함께 철길을 걷던 장면이 그 관계에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이는 자신이 만든 곡에 그녀가 가사를 쓰도록 제안하면서 두 사람의 마음을 합일(合一)시키고자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노래로 조선의 목소리가 되어 줘.


09.


앞서 "연희"와 "윤우"의 이야기를 먼저 짧게 꺼낸 것은 이 작품이 어느 캐릭터에 몰입해서 보더라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감독이 의도하는 방향은 "소율"의 시점에서 시작되고 끝이 나기 때문이다. "연희"의 이야기를 하면서 "소율"의 뒤에서 속앓이를 했을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대변하기는 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을 "소율"의 탓으로 돌리는 것 또한 가혹한 일이다. 중반부 이후의 장면에서 "소율"이 "경무국장"의 힘을 빌어 두 사람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소율"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동무'인 "연희"를 시기하거나 질투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언제나 "연희"를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연희"의 사정을 잘 아는 그녀는 처음 받은 급여로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선생의 LP를 선물하기도 했었고, 자신의 이상적 뮤즈로 생각했던 "이난영" 선생이 "연희"를 선택하는 순간에도 박수를 보냈던 인물이다. "연희"의 첫 공연 무대를 보러 가서도 자신도 모르게 피어난 질투심에 준비하지 못한 꽃다발을 다시 사서 돌아가려고 했던 것 모두 "소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 과연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10.


작품 속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애초에 "소율"에게 주어진 것은 단 세 가지 뿐이었다. 그녀가 타고났던 '정가'에 대한 재능과 어린 시절 만난 둘도 없는 '동무' "연희", 그리고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유일하게 전하고자 했던 정인 "윤우". 하지만 "소율"이 마음을 기대었던 이 세 가지 소중한 것들은 어느 날 한 순간 모두 함께 사라져 버림으로써 그녀의 손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그녀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많은 이들이 함께 생활하던 '권번'의 번영을 이끌었을 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비참하게 버림받던 "연희"를 친구로 맞이하여 함께 미래를 약속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윤우"에 대한 마음 역시 누구보다 소박하고 정갈하게 가꾸며 때를 기다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잃은 뒤에 "소율"은 어쩌면 세상 그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를 책망했던 것 같다. "이난영" 선생을 "연희"에게 소개하고자 했던 것도 그녀 본인이었고, 자신의 정인 "윤우"를 소개했던 것도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에. 때문에 그녀는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그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쪽("정무국장"의 애첩이 되는 길)을 선택하고 만다.


11.


사실 최근 많은 작품들이 엔딩에서 나름대로의 반전 코드를 삽입하느라 골머리를 썩히면서도 제대로 된 만족은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난영" 선생이 "소율"이 아닌 "연희"에게 찬사를 보내는 장면은 매우 간단한 트릭을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심리적으로 모든 관객들의 마음을 일순간 들었다 놓는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 이전에 늘어놓은 내러티브들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에게 부여하고 있는 개연성과 당위성을 영리하게 이용한 장면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장면에서 시작된 미묘한 균열은 작은 나비효과가 되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결말을 이끌어내고 만다. 이 부분만 보더라도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한 작품의 클라이막스에서 벌어질 '대단한 무언가' 하나만을 바라보며 모든 러닝타임을 희생하는 것이 아닌, 아주 사소한 영리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무국장"은 "소율"에게 그녀가 모든 것을 주었으니 그 역시 모든 것을 주겠노라 약속한다.


12.


처음부터 "소율"이 "정무국장"의 첩이 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분명하고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윤우"를 만난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작품 속 이야기 흐름이 "정무국장"과의 첫 대면 -> 조선의 마음이 되게 해 주겠다던 "윤우"의 약속 -> "윤우"에 의해 선택되는 "연희" 의 순으로 전개되고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우"가 "연희"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소율"이 극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는 "윤우"가 "연희"로 인해 자신을 떠나게 될까봐 불안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의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버리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 같다. 자신을 "정무국장"의 욕구에서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이가 바로 "윤우"라는 존재였기 때문에 말이다.


13.


그녀가 처음 "정무국장"에게 보내지던 날, 그러니까 "윤우"가 "소율"에게 자신의 노래를 주겠노라, 조선의 목소리가 되어달라 라고 말하기 하루 전 날, 그녀는 배후의 이야기를 모두 알면서도 자신을 그곳으로 보낸 "산월" - 자신의 정가 스승이자 사실 상의 어머니 - 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영화 속에서 "소율"을 그곳에 보낸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권번'의 번영을 위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실제로도 그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어화' 혹은 '예인'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기는 하나, 오랜 시간을 그 곳의 기생으로 살아와야만 했던 "산월"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조선 최고의 권력자에게 보내는 것만이 자신이 아끼던 "소율"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패("소율"을 꽃이라고 본다면, 그녀를 가장 잘 돋보이게 할 화병)가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소율"에게 있어 자신이 의지해오던 "산월"의 그런 행동은 "연희"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돈 몇 푼에 팔아치우는 것 이상의 충격이었으리라. 그리고 이 아픔은 "윤우"와 "연희"가 그녀를 떠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윤우"에게 "소율"은 과거, "연희"는 미래를 상징했을지도 모른다.


14.


이 작품 <해어화> 속에서 "윤우"가 "소율"을 먼저 자의적으로 바라보는 장면은 그가 처음 등장할 때 그녀의 사진을 집어드는 순간에 단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나 항상 "소율"이 그를 먼저 바라보고 있었다. '권번'을 나온 "연희"가 음반 녹음을 하는 곳에 "소율"이 직접 음식을 준비해 왔던 장면에서조차 그녀는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들에 잠시 겉도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단순한 외로움을 느꼈던 것일 뿐, 그 마음까지 의심치는 않았다. 오히려 "연희"의 첫 공연에서 계속해서 그녀만을 바라보는 "윤우"의 눈빛을 보고 어떤 불안함을 느끼게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꽃다발을 들고 다시 찾아간 그 곳에서 조금 전 느꼈던 그 불안의 이유를 비로소 직접 확인하게 된다.


네가 그렇게 다 만들었잖아.


15.


"소율"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길고 탐스러운 머리칼을 제 손으로 자르는 장면을 시작으로 이 영화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시작된다. 보통의 경우 영화 속 여주인공이 자신의 머리칼을 자르는 행위는 과거의 어떤 시점과의 단절로 표현되곤 하지만 이 작품 <해어화>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 행위는 그녀에게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행위이며, 그 동안 자신이 가장 두려워했던 행위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것)를 앞둔 시점에서의 현실 도피 행위, 그 동안 살아왔던 예인의 품위로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었던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자신의 머리를 자른 그녀는 "정무국장"을 직접 찾아가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무의미한 행위를 이 장면을 통해 실행하게 된다. 밝은 화톳불 앞에 눈이 멀어버린 불나방의 애처로운 몸짓과도 유사하게 말이다.


16.


일본의 "정무국장"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준 뒤에 "소율"은 어딘가 불안해 보일 때마다 자신의 손톱 뿌리 살점들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평생을 몸을 가꾸고 단장하는데 전념했을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해치는 장면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그녀는 자신을 두고 평생을 '권번' 밖 세상을 겪어 본 적이 없어 물정에 어둡다고 언급한다. '권번'을 떠난 "연희"의 곁에 "윤우"가 있었던 것과 반대로, 처음 세상에 발을 내딛은 그녀에게 홀로 주어진 이 낯선 상황들은 어쩌면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녀의 그런 행동이 비단 "윤우"와 "연희"를 향한 복수 하나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에게 벌어진 수 많은 일들 가운데 어느 하나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불행들과 그 불행에 대한 댓가로 자신을 망가뜨리고 만 스스로에 대한 후회.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음을 알기에 자신을 갉아내는 일 밖에는 남지 않았음에 대한 예감. 그런 것들이 모두 담긴 행동처럼 보인다.


가장 중요한 건 가수가 되는 것이야

17.


"소율"이 "옥향"(류혜영 역)에게 마음을 쓰던 장면은 이 영화에서 "일패"에 속한 인물이 "삼패"에 속한 이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와 관심을 건네는 장면이다. "정무국장"의 첩이 되고 난 뒤 권력의 비호를 받기는 했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 없던 "소율"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그녀에게 진심을 전한다. 그 동안 "권번" 내에서 자신과 다른 그룹으로 분류되었던 인물이기는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자신과 가장 밀접한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바로 "옥향"이었기 때문에 말이다. 또한, 그녀에게 쏟아지던 비난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녀가 전했던 이 때의 진심은 세월을 돌아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정무국장"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었지만, 또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18.


한편, 형무소에서 출소한 "윤우"는 자신의 마지막 곡과 함께 진심을 담은 편지를 "소율"에게 전하고는 자신이 사랑했던 "연희"와 함께 마음을 나누었던 그 철로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마지막이 이 철로에서 이루어졌기에 앞서 그와 "연희"의 마음이 처음으로 동했던 곳이라 이야기 했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죽음이 "소율"이라는 인물에 대한 미움과 증오보다는 "연희"에 대한 애정과 연민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상기시켜 볼 때, 그가 "소율"에게 자신의 마지막 곡을 건네 준 이유에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약 그 해석이 오래 전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그 약속에 대한 사죄의 이유로 "소율"에게 남게 된다면, 결국 마지막까지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이 된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기생이 되었는지부터 불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19.


자신을 증오하는 "윤우"의 앞에서 마지막까지 그의 곡을 받아내고자 했던 모습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희"의 노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소율"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윤우"가 그녀에게 곡을 써 주겠노라 약조했던 것은 '권번'이라는 굴레 밖 세상에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해 주었던 첫 언약이자,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진심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재능도, 자신의 몸과 마음도, 심지어 친구도 정인도 모두 잃어버린 "소율"이 유일하게 마음에 품어 지켜내고자 했던 단 하나의 약속이 아니었을까?


20.


많은 매력들이 있지만 이 영화를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는 것에는 하나의 큰 줄기를 따라 흐르는 캐릭터 각자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고, 또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어찌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작년에 손에 꼽을만큼 좋아했던 <뷰티 인사이드>의 주인공들이 모두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물론 아무 의미는 없지만, 이런 연관성을 찾아내고 싶을 정도로 나는 지금 이 작품에 빠져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이 작품의 타이틀인 <해어화>의 의미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서늘하게만 느껴진다. 하나의 꽃봉우리가 어려운 시절 속에 꽃을 피우기는 했으나,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향을 피워 낸, 어느 한 예인 이야기가 이 영화 속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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