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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25. 2016

#074. 시간이탈자

이 작품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01.


지난 해 영화 <엽기적인 그녀 2>의 제작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 때 나는 사실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제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그 작품의 앞을 가로막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추억 속 한 켠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작품이 같은 이름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된다는 것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왜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아름다운 추억은 추억 그대로 두고 싶은 마음. 내게 "곽재용" 감독은 그런 추억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비단 <엽기적인 그녀>(2001)만이 아니다. "조인성"과 "손예진"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낳기까지 했던 <클래식>(2003)은 수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 아직도 '자탄풍'의 노래가 들릴 때면 언급되는 작품으로 남았다. 그래. 2000년 대의 "곽재용" 감독은 그런 사람이었다. 작은 이야기로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한 켠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던... 그런데 1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조금 복잡하다. 그가 남긴 감수성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왠지 더 이상은 그의 작품을 바라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 그의 신작 영화 <시간이탈자>에 대한 이야기다.


02.


이 영화 <시간이탈자>는 기본적으로 타임워프(Time Warp)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의도적이었는지 문화계 전반의 우연한 흐름 중 하나였는지 알 길은 없으나, 최근 영화 <더 폰>(2015), 드라마 <나인>(2013), <시그널>(2016) 등에서 굉장히 자주 시도되고 있는 타입의 장르다. 다만 이런 특이한 소재의 작품들이 단기간에 연달아 대중에 공개될 때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여 특별히 차별된 지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관객들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어느 정도의 피로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 <시간이탈자>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핸디캡을 안고 출발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나를 찾아줘>(2014)와 <내가 잠들기 전에>(2014) 두 작품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물론 개봉 시기나 작품의 매듬새에 있어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가 더 괜찮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뒤이어 개봉한 <내가 잠들기 전에> 역시 "니콜 키드먼", "콜린 퍼스"의 연기력을 앞세워 그리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내가 잠들기 전에>의 참패. 만약 두 작품의 개봉 순서가 바뀌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 기본적으로 시간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타임리프", "타임워프", "타임슬립", "타임루프" 등의 개념이 활용되고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대표적인 "타임리프"의 경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 작품 <시간이탈자>와 <더 폰>과 같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타임워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이 함께 뒤섞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행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간여행자의 아내>, <어바웃 타임> 등에서 차용되는 "타임슬립"은 과거의 일정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타임루프"의 경우에는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이 동일한 기간/시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엣지 오브 투머로우>가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타임슬립은 분명히 이렇게 사용되었어야 하는데 !


03.


이 영화 <시간이탈자>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이 작품이 마케팅 과정에서 표방하고 있는 장르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작품이 홍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장르는 '감성추적 스릴러'다. 최근에 "모홍진" 감독의 영화 <널 기다리며>(2016)를 보다가 '감성 스릴러'라는 문구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거기에 '추적'이라는 단어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나는 어떤 작품 앞에 이렇게 추가되는 문구들이 늘어가면 갈수록 해당 작품이 스스로 자기의 발목을 묶어버리는 상황을 만드는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기본적으로 '장르'라는 것은 관객들이 자신의 취향을 결정하는 잣대로 이용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장르'에 따라 기대하게 하는 지점이 반드시 발생된다는 것. 예를 들어 '스릴러' 장르라면 영화 속 중심사건의 인과관계가 뚜렷하게, 하지만 비밀스럽게 드러나야 한다. 반대로 '감성(멜로)'의 경우에는 사건의 인과관계가 다소 모호하더라도 특정 행동 혹은 장면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긴 여운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작품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잡아내겠다고? 이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그런 설정이었는지, 아니면 홍보 단계에서 "곽재용" 감독의 옛 이미지를 차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과한 설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04.


더구나 '스릴러'를 표방하면서 '타임슬립' 혹은 '타임워프'의 소재를 활용한다면, 그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평행세계의 설정과 그 세계관을 이어 줄 연결고리에 대한 심도있는 고민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드라마 <시그널>이 큰 사랑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두 평행세계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두 세계가 전환되는 연결고리가 의심의 여지가 없을만큼 뚜렷했고 또 긴장감을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 작품의 경우에는 그런 지점들에서 큰 아쉬움이 느껴진다. 결국 엔딩에서 관객들에게 선사하려고 했던 '반전 코드'에 얽매였던 사고가 이런 안타까운 결과를 만들어내고 만 것인데, 그렇다고 그 반전이 그 이전의 스토리에서 전혀 유추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상기해 본다면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경우에는 등장 인물이 모두 한 번 이상 등장하는 순간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왜 잠들지 않는 것인가?

05.


과거의 시점과 현재의 시점을 연결하는 고리의 설정도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서로의 꿈을 통해 다른 시간을 소통한다는 설정 자체가 그리 흔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 연결고리의 그 존재 자체를 굉장히 가벼이 여기고 만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는 "지환"(조정석 역)이 사건을 해결하는 동안, "건우"(이진욱 역)가 잠들어 있는 장면이 두어번 등장하는데, 당시 빠르게 진행되는 영화의 속도감에 묻혀 관객들의 뇌리에는 크게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영화 <어바웃 타임>(2013)의 '옷장 신'이 오랫동안 회상되고, 드라마 <시그널>의 무전기가 시리즈 내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그런 지점이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영화 <더 폰>의 경우에는 그 연결고리가 작품의 타이틀로 표현되고 있을 정도다.


조금도 설레이지 않았던 건 나 혼자였을까?


06.


그 외에도 이 작품에서 유의미하게 다루어질 수 있었지만 아무런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요소들은 셀 수 없이 많을 정도다. 먼저 "임수정"이 맡은 "윤정"과 "소은" 두 사람의 캐릭터는 그저 이 영화가 약간의 로맨스를 자아내기 위한 설정에 불과하게 여겨진다. 1983년의 "윤정"이 죽은 뒤 22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나게 되는 같은 모습의 "소은"은 조금도 입체적이지 않다. 한 때 유행했던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점만 찍으면 다른 여자가 되던 설정과 동일하다. 거기에 졸업 앨범 속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여인의 사진을 보고도 겨우 눈만 조금 더 동그래지던 "임수정" 씨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도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두 평행세계 1983년과 2015년, 두 시점이 전혀 의미없이 제공되고 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중공군 미그기 사건"과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4강 진출" 등의 실제 사건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이 작품에 현실성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할 뿐,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에는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07.


이런 소소한 요소들을 넘어 전체적인 스토리에도 아쉬운 부분은 곳곳에 존재한다. 먼저 작품의 '멜로' 라인. 백 번 양보하여 서로 마음을 주고받고 있던 "지환"(조정석 역)과 "윤정"(1983년의 "임수정" 역)의 애틋함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아직 어떤 이야기도 주어진 적이 없었던 "건우"(이진욱 역)와 "소은"(2015년의 "임수정 역)의 러브 스토리는 감정적으로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범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다른 보통의 B급 작품을 보는 듯 하며,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을 갖지 못한 채 전체적으로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만 남기는 모습을 하고 말았다.


나는 여전히 그의 감수성을 사랑하지만..


08.


매년 신작들이 개봉되는 분위기를 보고 있자면, 벚꽃 시즌과 대학가 중간고사 기간이 겹치는 이 시즌에는 다양성 영화들과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다소 떨어지는 상업 영화들이 배급된다. 그리고 이 작품 <시간이탈자>는 그런 전형적인 모습을 따르고 있는 작품이면서, 그 중에서도 다소 아쉬운 퍼포먼스를 보인다고 해야겠다. 지난 작품 <은밀한 유혹>(2014)에 이어 이번 작품까지 연기력에서도, 작품의 흥행 면에 있어서도 아쉬움을 보인 "임수정"씨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 지도 궁금해 진다. 나는 여전히 "곽재용" 감독의 감수성을 좋아한다. 다만 그 스타일이 올드하더라도 그 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안타깝지는 않았을텐데, 지금의 모습은 마음을 헤짚던 그 때의 날카로움까지 모두 잃어버리신 듯 해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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