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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May 17. 2016

#075. 곡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줄 수 있는 만족감.




**이 글에는 기존에 공개되어 있던 "나홍진" 감독의 연출 의도와 다른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01.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류의 작품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작품의 해석에 다양한 시각이 투영될 여지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넓은 시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이 영화 <곡성>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많은 관객들이 엔딩 크레딧의 등장과 함께 영화에 대한 어떤 해답을 찾는 것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방금 관람을 끝낸 작품 속에서 내가 소화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지점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은 분명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인터넷 상의 누군가가 언급한 그 한 마디가 다른 모든 답안 위에 붉은 사선을 남기는 기준이 되어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 개봉 직전 "나홍진" 감독의 행보에 대해서도 상당한 유감스러움이 있다. 그는 이 작품이 개봉하기 하루 전,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와 함께 메가 토크라는 타이틀의 관객 시사를 진행하면서 자신이 완성해 놓은 이야기에 대한 모든 설명을 아주 친절하게 해석해 주셨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영상은 행사를 주최한 측의 의도성 여부와 관계없이 현재 인터넷 상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마치 하나의 해답처럼 말이다.


02.


나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으로 수용할 수 있는 관객층이 굉장히 좁을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싶다. 작품을 평가하는 잣대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매니악 집단 혹은 이해도가 높은 관객들에게만 이해가 용이하다면 '대중 예술'로서의 가치는 다소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쯤이면 많은 리뷰들을 통해 적절한 해석들이 쏟아지고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이전의 단계에서는 분명 어려움을 호소하는 관객들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높은 이해력을 필요로 하는 작품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내용을 소화할 수 있는 관객층의 연령대 역시 좁아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이후, 관객들이 영화의 이야기로 갑론을박을 펼칠만한 작품이 거의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런 지점의 가려움을 충분히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 <곡성>이 환영받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도 한국 영화에서 그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더욱 반가울 법하다. 자.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이야기 했던 감독의 행동이 다시 한 번 유감스럽다. "나홍진" 감독은 관객들의 피부에 가려움이 채 생기기도 전에 그 자리를 알아서 미리 긁어줘 버린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석이 쏟아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감독의 행동이 다소 섣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정 장면을 두고 감독이 A라는 해석을 내놓고 만다면,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03.


몇 년 전에 상수동의 어느 한 카페에서 '밀푀유'라는 디저트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식 디저트라는 이 파이는 시트 한 장이 수 백층으로 잘게 구성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바삭거리는 느낌을 주면서도 그 사이 사이에 마련된 작은 공간들 때문에 미묘한 부드러움을 주는 파이였다. 이 영화 <곡성>을 보는 내내 나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세심하면서도 치밀하게 짜여진 몇 개의 내러티브들이 섬세하고도 잘게 조각난 채로 서로의 이야기들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을 모두 다 해내고 있는 듯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마을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이야기를 완성시켜내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스크린에 그려내는 모습은 각각의 작은 공간에서 밀도 있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이 156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 속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감독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과몰입된 듯 다소 과해 보이는 설정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궁금해 하는 캐릭터의 진실에 대한 지점 이상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생동감 있게 잘 표현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나홍진" 감독은 6년의 공백기간 동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듯 하다.


04.


영화는 크게 4개의 막(Act)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처음에서 "일본인 외지인"(쿠니무라 준 역)이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워넣고 있던 장면부터 "종구"(곽도원 역)의 딸 "효진"(김환희 역)이 첫 발작을 일으키던 장면까지가 1막으로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다. 교회에서 부제직을 맡고 있던 "양이삼"(김도윤 역)의 등장에서 "효진"이 첫 살인을 저지르던 장면까지가 2막. 여기에서는 1막에서 펼쳐 놓았던 이야기를 좀 더 심화시키고, 모호하게 남아있던 인물들의 갈등을 표면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세 번째는 무당 "일광"(황정민 역)이 등장해 굿판을 벌이는 순간부터 "일본인 외지인"이 트럭에 치이는 장면까지로 감독이 가장 많은 미끼를 풀어 놓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뒤로 남은 부분이 마지막 4막으로 여겨지는데 그 동안 관객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던 많은 부분들이 가감없이 표현되고, 이 작품을 통해 "나홍진"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그렇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정확한 지점에서 칼 같은 분절이 이루어지고, 그 분절 속에서 커다란 그림이 완성되는데, 위에서 설명한 2막 중 "종구"가 "일본인 외지인"을 찾아가 3일 안에 마을을 떠나라고 이야기 한 뒤로 2막, 3막, 4막의 순서로 시간이 배열되는 것과 같은 부분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05.


이 네 개의 분절된 막을 통과하면서 영화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커다란 주제를 동시에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누가 복음 24장 37절 ~ 39절]로 대변되는 인간의 믿음에 대한 부분이 첫 번째, 영화의 전반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낚시'와 관련하여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에 대한 것이 그 두 번째, 마지막이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보내고 세상에 홀로 남게 되는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과 그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슬픔의 무게에 대한 것. 분명히 표면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내용은 첫 번째의 '믿음'과 관련된 부분이지만 나머지 두 주제에 대한 표현 역시 그 무게감에 있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엔 4개의 막을 통해 3개의 메세지를 위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들을 표면에서 지우기 위한 자극적인 소재들로 장면을 가리고 있는 영화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06.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나홍진" 감독의 가장 큰 변화라고 느꼈던 것은 그가 지난 작품들과 달리 개인의 본능이 아닌 공동체의 본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하는 지점에 있었다. 지난 <추격자>(2008), <황해>(2010) 등의 작품에서 역시 그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개인의 시점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를 체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형사 "중호"(김윤식 역)를 보면서 그가 사회의 정의를 위해 움직인다는 해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미진"의 생사보다는 사건 해결을 통한 공적 관리에 급급한 경찰 내부의 부패한 모습을 볼 때, 그가 살인범 "영민"(하정우 역)을 쫓고자 했던 것은 사회 전체(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부패된 조직에 맞서 자신의 신념(개인)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 <곡성>에서 역시 주인공 "종구"의 모든 행동들이 자신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을 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모든 시선이 자신의 가족과 딸의 안위에 향해 있었다는 점을 볼 때 "나홍진" 감독의 이야기는 더 이상 개인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좁게는 가족을 위한 개인의 욕망과 바램에 대한 이야기, 더 나아가서는 한 마을의 안위와 바램을 위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종구"라는 인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07.


이 이야기를 개인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종구"라는 인물이 작품 전체를 통해 의외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화재가 일어나 한 가정이 파괴되었을 때, 현장을 방문한 경찰 "종구"의 모습은 지극히 소극적이다.(화재가 났던 사건 현장에서 기둥에 매달려 있던 '금어초'를 발견하고서도 큰 의심없이 돌아서고 마는 등의 행동) 자신에게 정확한 지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는 결코 다른 인물들보다 먼저 사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건 현장에서 역시 언제나 누군가의 등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파출소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파출소의 차단기가 내려가고, 신원 미상의 나체 여성을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사건의 본질을 확인하기 보다는, 국과수의 결과(독버섯에 의한 중독 및 환각)에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는 태도로 일관하며 사건을 결론 짓는다. 그의 가족이 이 사건에 휘말리기 전까지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딸 "효진"이 영화 속 핵심 사건에 개입되기 시작하고, 자신의 가족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그는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 "종구"라는 인물이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나약한 캐릭터이지만, 적어도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울타리 내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는 인물로 해석되는 이유다.


08.


앞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대한 생각들을 표현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구조적 관계 및 설정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무명"(천우희 역)이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일광", "외지인"이 같은 편이었다는 해석에는 다른 생각을 갖는다. 그 두 사람이 마을의 사람들을 해치기 위한 '악'의 존재로써 나타났던 것은 맞지만, 오히려 이 두 인물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마을에 접근한 대상이었다는 생각이 더 깊게 든다. 굳이 표현하자면 "외지인"이라는 악마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마을을 삼키려고 하는 시점에서 "일광"이라는 악마가 그 밥상을 차지하기 위해 숟가락을 얹는 정도의 이야기랄까? 영화 전체의 구성을 볼 때 감독은 분명히 이 지점을 가장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처음에서 설명한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두 사람이 같은 편이었다는 설정에 대한 늬앙스를 풍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이 지점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까지 논의해야 좋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같은 편이었다는 해석을 따라 이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듯한 여러 가지 맥거핀들(흔히들 기저귀, 사진기, 사진 등을 언급한다.)이 너무나 단순하고 성의없어 보이는 느낌이 든다.


낚시할 적에 뭐 어떤게 딸려 나오는 지 알고 하능가?


09.


다시 돌아와서, 이 영화의 시작에서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워넣고 있는 "외지인"의 모습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결코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영화 속에서 왜 자신의 딸이 악의 목표가 되었는지를 궁금해하는 "종구"에게 "일광"은 그런 이야기를 남긴다. "낚시할 적에 뭐 어떤게 딸려 나오는 지 알고 하능가?" 그렇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처음으로 "외지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종구"도 "효진"도 아닌 마을 건강원 주인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머리가 터지고 정신만 조금 잃었을 뿐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악의 존재를 발견한 가장 첫 번째 인물은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뚜렷하다. 운명이라는 것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뒤에서 "무명"이 이야기 하는 인과관계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해석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다음에서 이야기 할 "외지인"이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의 직접적인 목표가 되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었다는 점과도 이어지는 부분이긴 하지만, 결국 오프닝 타이틀이 드러나기 직전에 아주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이 바늘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영화의 인트로에 등장하는 그의 낚시바늘은 상당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0.


처음으로 "종구"와 그의 부인(장소연 역)이 딸의 시선을 피해 자동차에서 성관계를 맺는 장면을 두고 많은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린 건 사실이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남녀의 성행위는 그리 가볍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는 남녀의 섹스와 관련된 장면이 꼭 다섯 번 등장한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종구"와 그의 아내가 보여줬던 장면(가장 일반적인 개념의 행위), "외지인"이 바닷가에서 시도했다는 화재가 난 집의 여주인에 대한 겁탈. 그리고 "외지인"의 집을 처음 탐색할 때 등장했던 음란서적(행위가 수단이 된다는 간접적 예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황상 "종구"의 딸이 "외지인"의 의해 성폭행을 당한 흔적. 마지막으로 "일광"이 살을 날리는 굿을 하기 직전에 언급했던 오입을 하지 말라던 이야기까지(행위에 대한 종교적 개념의 시각). 그리고 이 다섯 번의 행위는 각자가 모두 다른 의미를 지니면서, 결국 온 몸에 종기가 돋으며 악령이 깃드는 것이 "외지인"이라는 악령과의 성관계, 혹은 그 악령이 깃든 인간과의 접을 통해서 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11.


앞서 설명했듯이 이 영화는 시점이나 장소의 변화에 있어서는 상당히 정확한 지점에서 이야기가 분절되고 각각의 내러티브 깔끔하게 구획되어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모호하다고 느끼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의문을 느끼는 이유는 '악령과 인간의 구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과 '기존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 <곡성>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그것의 존재가 인간인지 악령인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선령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무명"조차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실체가 밝혀질 정도로 "외지인"과 "일광" 등의 존재 자체에 대한 구분은 모호한 채로 남겨진다. 그리고 감독은 이 부분을 영화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게는 '령'이라는 것이 깃들어 있다는 대사와 [누가복음]의 구절을 통해 갈무리하는데, 이 대사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들조차 이 세 사람의 존재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령'으로써 대해지는 것인지, 실존하는 대상에 '령'이 깃들어 있는 존재인지 명확하게 구분지어주지 않는다. 또 하나, "외지인"과 "일광"이 같은 편이든 아니든 그 사실과 무관하게 두 사람이 모두 주인공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악령의 존재라는 것은 영화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많은 작품에서 하나의 이야기 속에 하나의 악이 존재하는 모습들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종구"를 도와주기 위해 "일광"이 등장하는 순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외지인"을 적으로 돌려세우고 만다. 왜? "일광"은 분명히 도움을 주러 온 캐릭터일 것이고 이 작품에서도 악령은 하나일 것이므로.. 그리고 감독은 그 지점을 예리하고 날카롭게 파고든다.


12.


이 영화를 지켜보는 시선 가운데 가장 불편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모든 내용을 기독교 교리와 관련된 이야기들로 치환해 놓은 것이었다. 특정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 영화의 '믿음'과 관련된 주제를 종교적 믿음과 연결시키는 것은 다소 감정적이지 않나 싶다. 이 영화가 많은 부분에 있어 기독교적 인용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종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믿음'과 관련된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같이 종교적 의미에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를 놓고 전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만드는 개인적 신념(혹은 행위)의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일광"에게 속고 있는 "종구"를 만류하면서 "효진"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종구"의 업보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무명"은 이야기 하지만, 사실 "종구"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종구"의 이런 생각은 "일광"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영화의 러닝타임 전체를 통해 지켜봐 왔듯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던 "종구"의 입장에서 초자연적 존재인 "무명"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 '믿음'과 관련된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아주 보편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표면적으로 "무명"이 제시한 닭이 세 번 울 때까지라는 조건을 믿느냐에 대한 유무를 떠나, 이 영화는 우리가 애초에 하나의 입장(믿음)만을 제시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굿판 대결은 그 목적 이전 한국 영화에 없던 샤머니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13.


가장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던 영화 속 논란의 장면, "일광"과 "외지인"의 굿판 대결에 대해 잠깐 언급해야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이 영화 <곡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물의 살이 누구를 향하는 지, 그 결과가 어떻게 파생되는 지는 결국 영화가 끝난 뒤에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오락적 요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서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모습이 최근 "나홍진" 감독이 밝힌 연출 의도와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기본적으로 "일광"과 "외지인"이 같은 편에 선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한 바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종구"의 가족을 비롯한 이 마을 사람들의 령을 수집하여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 싶어하기는 했으나, 하나의 마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자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때문에 "일광"이 살을 날린 것이 "외지인"이 아닌 "효진"이었다는 것에는 결과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그것이 "종구"의 의심을 "외지인"에게 쏠리게 하기 위했음이 아니라 자신이 그 령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하지만, "외지인"이 굿판을 벌인 것은 누군가에게 살을 날리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4.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외지인"이 누군가를 해할 때는 언제나 흑색의 동물(까마귀, 흑염소 등)을 이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날 굿판을 벌일 때는 검은 닭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외지인"이 그날 치명상을 입기는 했으나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공격이 "일광"에 의한 것이었는지, 굿판이 끝나고 잠시 등장하는 "무명"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 맞고, 그가 자신의 목숨을 위한 굿을 벌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더불어 그가 "박춘배"라는 인물을 환생시켜 좀비로 만든 것은 그 때의 주술로 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좀비화 시킨 것 역시 아니다. 그는 그 굿판이 벌어지기 전부터 그를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이고, 트럭에서 "박춘배"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을 때 당황하는 표정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의 계획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장면이 집단 광기의 폭력성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15.


솔직히 이 좀비를 탄생시킨 의도를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러닝타임 내내 몰입하고 있다가 이 장면에서 그 몰입이 잠깐 깨어졌음을 느꼈을 정도로 영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에서 굳이 없어도 된다고 느끼는 부분이 몇 장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과했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바로 이 좀비 신과 독버섯에 대한 언급이 TV를 통해 반복되는 장면이다. 이 장면들이 내가 캐치하지 못한 지점의 중요한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전체의 흐름에서 핵심적인 상황을 이끌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명확한 무언가를 얻지 못하도록 약간의 혼선(이야깃거리)을 제공하는 역할로 남을 뿐. 오히려 이런 장면이 아니라 감독이 후반 작업 과정에서 Omit(편집) 시켰다는 부분들에 대한 언급이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시방 가믄 니 가족 다 죽어부러...


16.


영화 속 다른 모든 장면을 떠나서 "무명"과 "종구"가 대립하는 마지막 장면은 "종구"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긴장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만 놓고 본다면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자신의 집으로 향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영화의 엔딩에 드러날 결과물에 대한 원인일 뿐이지만, 오히려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선택을 저어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관객인 나 역시 숨가쁘게 지나 온 러닝타임 모두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크게 세 번의 결단을 내렸다. "외지인"의 집을 찾아가 모든 기물을 박살내며 난리를 벌였고, "일광"의 굿판에서도 중간에 뛰어들어 깽판을 놓았다. 모든 일이 지나고 결과적으로는 그의 행동이 옳은 일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 상황에서 "종구"에게 지난 두 번의 행동은 긍정적인 결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외지인"에게 그 난리를 벌인 후에 자신의 딸이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고, 굿판을 멈추었기 때문에 "효진"의 병이 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영화 속에서 "종구"는 "일광"이 "외지인"을 향해 살을 날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상황에서 또 한 번 던져진 결단의 순간. 이번 역시 자신이 실수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자명하다. 자신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개. 그 동안 믿고 의지했던 사람처럼 보이는 "일광"과 여전히 존재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무명". "종구"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집으로 향한 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두고 그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 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까? 허탈하게 쓰러져 앉은 그의 표정에서 그 대답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17.


마지막 "무명"과 "종구"가 대립하는 장면과 "악마"와 부제 "이삼"이 만나는 장면이 교차 편집된 것은 상당히 신선했다. 감독 본인이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악마"와 "부제"의 대화)와 그 동안 이끌어 온 영화의 스토리("무명"과 "종구"의 대립)를 따로 또 같이 마무리 짓는 그 방식이 흔한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수미상관식으로 엮어내 마무리 하고자 했던 생각과 마지막 엔딩컷을 "종구"의 남겨진 모습으로 마무리 하고자 했던 것을 동시에 표현해 낸 방법 같다는 생각도 든다. 즉, 영화의 시작에서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워내고 있던 "외지인"이 결국 자신의 바늘에 목적했던 바를 얻어 악마가 되었다는 의미로 처음과 끝을 연결하고, "종구"의 모습을 통해서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가 안고 살아가야 하는 무거운 슬픔과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근원적 나약함,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무기력함을 표현하고자 한 게 아닐까 싶다.


18.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외지인"의 이야기와 "일광"이 마지막에 사진기를 꺼내들던 장면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두 사람이 같은 교육(?)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영화 속에서 악령은 자신이 원하는 령을 얻기 위해서 사진기를 이용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결국 영화의 시작에서 등장했던 "외지인"의 낚시 바늘이 그 목적은 마을에 있는 누군가의 령을 통해 악마가 되고자 했음이고, 결과적으로는 "일광"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효진"은 원래부터 "외지인"이 목적으로 두고 있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성관계의 의미가 통한다면, "효진"은 "외지인"에 의해 악령이 깃들기 시작한 소녀다. 때문에 누가 "효진"을 없애 령을 얻느냐와 무관하게, "외지인"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효진"을 악령화 시킬 수 있다면 그 령은 "외지인"에게로 속하게 되는 것. 하지만 트럭에 치어 죽은 줄 알았던 "외지인"은 자신의 기척을 숨긴 채 동굴에 숨어 있다가 "효진"의 것을 취해 악마가 되었던 것이고, 그것을 잘 몰랐던 "일광"은 그녀가 죽은 뒤에 자신의 사진기를 통해 그녀의 령을 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는 "효진" 뿐만 아니라 엄마와 할머니까지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니 "일광" 역시 다른 이의 령을 취한 상황이 된다. 물론 이 부분은 온전히 개인적 사견일 뿐이고 관람 후에 내게 남겨진 유희거리일 뿐이다.


결국 그에게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


19.


이 영화의 타이틀인 <곡성(哭聲)>의 원 의미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큰 소리내어 우는 것'을 뜻한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결국 이 단어조차 영화의 엔딩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지키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영화가 복잡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 상의 인과관계들을 떠나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홍진"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거나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 상황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남겨진 이의 모습은 그 누구의 위로로도 쉬이 잔잔해질 수 없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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