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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n 08. 2016

#079. 미 비포 유

나를 만나기 전의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01.


최근에 많이 쓰는 용어가 하나 있다. '톤 앤 매너(Tone & Manner)'. 일반적으로 광고와 브랜딩 작업에서 자주 쓰이는 이 용어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할 때 일관된 방향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단어가 일련의 예술 작품이나 영화의 영역에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 문화라는 것은 작품과 관련된 창작자가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혹은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담고 있는 유형물이다. 같은 영화가 리메이크되어 탄생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평가나 관객들이 받게 되는 경험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스파이더 맨>이 계속해서 환생할 수 있는 이유도 이 '톤 앤 매너'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물론 매체가 달라지면, 이 '톤 앤 매너'를 좌우하는 요소들은 달라질 수 있다. 영화에서도 타이틀 롤을 맡은 주인공 하나만 바뀌어도 그 느낌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미 비포 유>는 깊은 멜로의 절절함이 강점이라기보다는 '톤 앤 매너'에 의해 관객들의 감정을 잘 요리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꿈마저 접어놓았다.

02.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들이 그렇지만 이 작품 역시 기본적인 뼈대는 단순하다. 불의의 사고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부잣집 도련님과 그의 주변에서 시종일관 밝은 모습을 보이는 여주인공 '캔디'의 이야기. 극의 후반에서 스토리의 키를 쥐고 있는 이물이 다소 비극적인 선택을 맞이하게 되는 부분이 조금 색다르기는 하나, 우리가 전혀 겪어보지 않았던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책 없이 언제나 밝은 모습인 "루이자"(에밀리아 클라크 역)의 모습과 그런 그녀의 노력 앞에 마음을 굳게 닫고 있던 "윌"(샘 클라플린 역)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에서 두근거림을 느낀다. 어쩌면 갖고 싶은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씩 얻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현실에서 놓치고 말았던 이와의 대리 만족을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03.


주변 모든 이에게 마음을 닫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윌"과 연민의 정으로 시작해 조금씩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루이자"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영화는 의외로 두 사람의 깊은 이야기를 담아내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장면들에서 "루이자"의 집안 환경이 어떤지, 그녀가 왜 꿈을 찾아 맨체스터로 향하지 못했는지 대략 알 수 있기는 하지만 그녀와 관련된 거의 모든 장면은 "윌"과 관련된 에피소드로 그려진다. "윌"의 이야기 역시 동일하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사고를 겪은 후에 어떤 과정들을 겪어왔는지, 자신의 지난 과거는 조금 더 명확하게 어떠했는지 궁금했지만 그것까지 비치지는 않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두 사람이 함께 성벽에 올라, 파리에서 겪었던 돌아가고 싶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그의 진심은 정리된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영화 <미 비포 유>의 '톤 앤 매너'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나의 욕심대로 이 작품이 "윌"의 이야기를 조금 더 무겁게 다루거나 두 사람의 과거를 진지하게 고찰했다면, 이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윌"의 선택은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감당한다는 것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도움을 받고 싶어 해야 도울 수가 있죠.


04.


"윌"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처음 "루이자"를 만난 "윌"은 자신의 상태를 굉장히 심각하게 보여주고자 행동한다. 장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그런 행동을 통해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이들이 그의 어머니가 설정해 둔 급여만 보고 다가왔다 금방 떠나버렸는 지를 유추할 수 있다. 자신을 제외한 타인들에게 사고를 당한 그가 거리를 두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마음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 마음을 건넬 시간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이자"는 그에게 조금 다른 존재였던 것 같다.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그 시간을 모두 함께 보낸 "루이자" 앞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건네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윌"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주회에서 행복해하던 "루이자"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의 표정만 보더라도 "윌"은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남자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때 세상을 가진 듯하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아무리 "루이자"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지금 모습의 자신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녀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녀를 만난 것이 그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의지를 더욱 키웠던 게 아닐까 싶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지막 마음을 열어보이는 "윌".

05.


두 사람의 이야기에 깊게 빠지다 보면 잊게 되는 인물이 하나 생기게 된다. "루이자"의 남자친구인 "패트릭"(매튜 루이스 역). 사실 그의 입장도 억울하긴 하다. 믿고 있었던 여자 친구가 돈 많은 남자 집에 들어가 간병을 한다더니 그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자신과 미리 약속해 둔 휴가까지 그 부잣집 도련님 때문에 못 간단다. 이게 한국인의 정서로 판단하는 게 옳은 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패트릭"의 행동들 역시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패트릭"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이기주의적이었다. 언제나 "패트릭"이 제안하는 모든 일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에 맞춰 채워져 있었고, 그녀의 생일날 저녁 모임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 때문에 늦게 도착했던 그였다. "루이자"의 추억에 맞춰 범블비 스타킹을 선물한 "윌"과 달리 "패트릭"의 선물 역시 어쩌면 그의 취향대로였으리라. "루이자"와 "패트릭" 두 사람이 이별을 맞이하던 순간에도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지 않았다. 너무나 해맑고 착한 "루이자"였기에 관계가 유지되어 온 것은 아니었을까? 꼭 "윌"의 존재가 아니었다 할 지라도 말이다.


무엇이든 그렇게 좋아해 본 적 없어요?


06.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싶은 건 바로 "윌"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아들의 선택에 대해 두 사람이 갈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괴로운 삶을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을 지켜보기보다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는 아버지와 절대로 아들을 그렇게 보낼 수 없다던 어머니의 입장. 당신들은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루이자"라는 존재에게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는 그 마음. 특히 담담하게 받아들이자던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신문에 실린 "윌"의 건강한 모습이 스크랩되어 장식으로 남아 있는 부분 때문에라도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진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일지 모르지만, 그런 자식들에 대해 모든 순간이 세상 처음일 수밖에 없다는 어디선가 들었던 그 이야기가 새삼스레 떠 올랐다. 양 쪽의 이야기가 조금도 틀리지 않게 들리는 까닭은 나 역시 언제나 헌신적이었던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 아닐까?

분량은 크지 않지만 그의 부모의 마음까지 놓치지 않았다.

07.


사실 작품의 내용을 떠나 가장 놀라웠던 건 "에밀리아 클라크"의 모습이었다. 몇 해에 걸쳐 유일하게 보고 있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리즈에서 그녀는 아주 강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작품 속의 노출 논란과는 별개로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노예 해방을 주장하던 그녀가 저렇게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이 작품에 녹아들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미술팀의 의도적인 계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레트로 풍의 독특한 칼라감 역시 이 작품에서 그녀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바웃 타임>의 "레이첼 맥아담스"를 처음 만났을 때나, <러브, 로지>에서 "릴리 콜린스"를 만났을 때의 상큼함 이상으로 이 작품에서의 "에밀리아 클라크"는 오롯이 자신만의 분위기로 작품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녀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큰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겨진 그녀의 삶이 담담하기에 더욱 안타깝다.

08.


그가 세상을 떠나고 "윌"의 유언대로 파리를 찾아 자신이 원했던 공부를 시작하는 "루이자". 과거의 아픔을 뒤로 하고 세상에 남은 이의 삶이 그리 슬프지도 않게, 또 그리 기쁘지도 않게, 담담하게 보여지는 장면들이 또 다른 영화 <원 데이>를 기억나게 했다. 어쩌면 마지막에 "루이자"에게 남긴 "윌"의 이야기야 말로 그가 만약 자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면 "루이자"에게 주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 행복해 하는 "루이자"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행복도 찾고 싶었을 것이고 말이다. 영화의 처음에서 집을 나서며 자신의 옛 여자친구에게 오늘 저녁은 자신이 하겠다던 그의 말만 반추해 보더라도, 그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주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한 시간의 두 사람.

09.


표면적으로 사랑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결국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서로가 알아가는 과정의 반짝거림과 서로에 대한 존중에 그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톤 앤 매너'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이 영화가 안락사의 무게감을 의도적으로 덜고자 하는 것에는 관계의 결과론적인 무언가보다는 서로가 알아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쌓여가는 마음의 무게를 더욱 이야기 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전이되는 것. 이라는 생각이 지금 막 떠올랐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윌"이 이야기를 통해 "루이자"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고, 현실의 굴레에 묶여 있었던 "루이자"의 사랑을 통해 "윌"은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Just live well, Just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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