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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Oct 02. 2016

#090. 아수라

대중예술이라는 상품이 갖는 태생적 한계.




01.


하나의 작품에서 드라마를 표현해 내는 측면에 있어서 올해 한국 영화들은 하나같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감독이 연출하느냐에 따라, 주요 캐릭터를 어떤 배우가 소화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른 감독이 연출하고,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같은 모습을 보게 되는 느낌이다. 이런 경우에 스크린 앞에서 상당히 무력하다고 느낀다. 중반부가 넘어가면 이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진행될 지, 심지어는 이 장면에서 어떤 대사를 내뱉을지도 전부 찍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아직도 러닝타임은 1시간이 넘게 남은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가 그 방향 그대로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더욱 무력해짐을 느끼고. 영화 <아수라> 역시 똑같다. 충무로에서 유명하다는 배우들을 모두 끌어모아 놓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때리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엔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동일한 내러티브의 재사용에 불과하다. 도대체 이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무엇일까?


02.


이 영화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에서 한국형 범죄 누아르와는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었으며, 서사 구조나 캐릭터들이 패턴화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이야기 한다. 글쎄 그가 생각하는 한국형 범죄 느와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언급이 되고 있지 않지만, 이 영화가 그의 그런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작년에 개봉한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2015)이 하드보일드 계보에서 벗어난 변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도, 그리고 2000년도 <무간도> 시리즈로부터 파생된 홍콩 느와르 - 사실 한국형 느와르라고 불리는 기존의 작품들 역시 이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 와는 달리, 기존의 팜므 파탈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의 여성 "김혜경"(전도연 역)을 앞세워 오히려 1940년대의 '필름 느와르' 장르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으로 재해석 해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이번 영화 <아수라> 역시 홍콩 느와르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 크다. 당시의 홍콩 느와르 필름들이 보여주는 감정이 우선된 스타일리쉬함이 이 영화의 주된 목적이라고 보더라도 아쉬움이 크게 남는 것이 사실. 아니,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플롯의 치밀함에 있어서는 그 당시 유명했던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 시리즈나 "맥조휘", "유위강" 감독의 <무간도> 시리즈의 하위 버전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1) 80년대의 홍콩 느와르와 2000년대 이후의 홍콩 느와르가 보이는 성격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야기보다는 감정적 표현에 더 치우친 모습을 보인다는 것, 팜므 파탈로 일컬어지는 여성의 역할이 극단적으로 제한된다는 것, 장면의 스타일리쉬에 집중한다는 것과 같은 공통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03.


직전에 있었던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에 대해 넘버링 무비 글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인스타그램 계정의 짧은 글을 통해 '영화를 보는 내내 스토리는 있지만, 이야기는 없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언급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건, 분명히 이 영화 <아수라>와 <밀정>의 중심 내러티브가 그 모습은 다를지언정,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우진"(공유 역)과 "하시모토"(엄태구 역)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이정출"(송강호 역)의 모습과, "박성배"(황정민 역)와 "김차인"(곽도원 역) 사이에서 자신을 갉아먹는 "한도경"(정우성 역)이 교묘하게 오버랩 된다고 느끼는 것이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영화의 차이는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는 것과, 두 주인공의 결과론적인 선택이 다르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김성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어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 기본적으로 느와르 장르가 다른 장르들에 비해 감정에 조금 더 밀도있는 관심을 쏟고 외적으로 보여지는 것들에 무게를 둔다지만, 이렇게 이야기가 빈약해서는 그런 부분들에 아무리 큰 강점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제 살을 갉아먹을 뿐이다.


저는요, 이기는 편이 내 편입니다.


04.


실제로 영화 <아수라>가 가장 간과하고 있는 지점은 이야기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주인공인 "한도경"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행동들의 근거가 되는 동력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몇 번의 병실 장면을 통해 그의 아내인 "정윤희"(오연아 역)가 심각한 병에 걸려있다는 것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제로 영화에서는 시놉시스를 읽지 않으면 그녀의 병이 암이라는 것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부분의 가벼움을 논외로 하더라도 "한도경"이 "박성배"와 결탁하여 더러운 짓을 일삼는 것을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함으로 설정해 놓은 것을 "김차인"의 등장과 함께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외면하는 것으로 저울질하는 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 성매매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으로 어설프게 협박하던 장면은 더욱 그렇다. - 더구나 이 영화는 몇 번이나 "한도경"이라는 캐릭터에게 아내 앞에서 순정을 지키는 남편의 모습을 강요하는데, 그런 그가 "박성배"와 "김차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그렇게 와 닿지가 않는다. 막말로 감방에 들어가서 몇 년 썩더라도, "박성배"의 비호를 받는 게 더 현실적인 계산이 아닌가. 그런 플롯을 가진 영화들이 기존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다.



05.


그런 점에서 "한도경"이 "박성배"의 필리핀 조직들과 카체이스를 벌이는 장면 역시 그의 심리적 불안에서부터 야기되는 스트레스의 표출, 분노의 극대화라고 보이기 보다는 단순히 자신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경찰로서의 자존심 같은 것의 찌질한 발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총 내놔, 내 총'이라는 그의 대사 역시 우습게 들리는 까닭이다. 이 장면이 조금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싶었다면, 이전에 그가 경찰로서 갖고 있던 어떤 심리적 마지노 선을 극대화 시켜주는 장면을 삽입하거나, 후반부에서 그가 되찾은 총을 통해 무엇인가 유의미한 장면을 만들어냈었어야만 했다.


06.


그나마 이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건 "문선모"(주지훈 역)라는 인물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작대기"(김원해 역)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고 장면을 보면, 그는 원래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갖고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 상황에서 선보고를 하려는 모습이나, 자신의 잘못을 "작대기"의 탓으로 돌리려는 "한도경"의 모습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들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한 그가 "한도경"의 비양심적인 행동에 어떤 제동을 걸지 못하는 것은, 한 편으로 그가 누군가의 인정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원칙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수인 "한도경"이 벌이는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경찰 조직이라는 하나의 사회 속에서 그에게 "한도경"이라는 인물에게 인정받는 행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기도 하다. 경찰 조직을 뒤로 하고 "박성배" 시장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 역시 모두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나는 이런 미친 새끼가 좋아. 우리 성무 진짜 남자네잉-


07.


그런데 "박성배" 시장의 밑으로 들어간 "문선모"는 그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도경"은 돈과 권력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사실 "문선모"의 변화는 자신만 어두운 공간에 던져두고 정작 본인은 양 쪽에 발을 걸쳐 놓은 채 기회를 엿보는 듯한 "한도경"이라는 인물에 대한 배신감과 질투에서 기인한다. 더 이상 양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은 그 곳에서 최고가 되는 것.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기에, 그 대상이 "한도경"이라고 할 지언정 그는 "박성배"의 신임을 얻기 위한 모든 행위를 멈출 수가 없게 되고 만다. "태병조"(김해곤 역)라는 인물을 차로 들이받은 뒤 질근질근 밟아 숨을 끊어버리는 그의 모습 모두 그 목적은 단 하나일 뿐이다.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한도경"과 벌이는 1:1 격투신은 누가 누구를 죽이기 위한 몸부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가지 마음을 아직 어쩌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문선모"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상이다.


08.


앞서 "김성수" 감독이 이 영화 <아수라>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서사 구조나 캐릭터들이 패턴화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배우 "정우성"을 이용하는 모습은 그 옛날 20여년 전,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9) 시절과 조금도 달라보이지 않는다. 특히 카체이싱 장면이 등장하기 전에 독백을 내뱉으며 추격하는 "한도경"의 모습은 <비트> 속에서 내겐 꿈이 없다며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민"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간간이 등장하는 그의 대사들 역시 동일하다. 문제는 시대가 변했다는 데 있다. 그 당시에는 겉멋으로 작품을 포장하는 방식이 통했을 지 모르겠으나, 이제 더 이상 빈약한 스토리를 스타일만으로 끌고 가는 작품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09.


오늘 이 영화 <아수라>에서 아쉬움을 토로한 많은 부분들은 비단 이 작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이라는 단어에 '대중'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장르의 "상품"들이 갖는 태생적 한계가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에 있기는 하지만, 그 이유 하나만으로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압도적인 연기를 두 눈으로 보면서도 이런 아쉬움을 토로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 다수의 반응이 부정적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것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이 해마다 늘어가게 된다면, 분명히 산업 자체에도 어떤 변화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아들인 "요나스 쿠아론" 감독이 연출한 <디스에르토>의 예고편에 <그래비티>라는 단어를 화면 한가득 집어넣는 그런 마케팅 역시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감독 혼자만의 문제라기보다 산업이 극복해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2) 실제로 "요나스 쿠아론" 감독이 자신의 아버지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함께 <그래비티>의 각본을 쓰기는 했으나, 영화 <디스에르토>의 티저에서 강조하는 <그래비티>의 의미는 마치 이 영화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알고 영화를 관람하게 되는 관객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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