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인듯 꿈이 아닌 꿈이 되어버린..
그런데 무슨 관계들인가..?
영화 <경주>(2014)가 개봉하면서 "장률" 감독은 예상 외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세계 3대 국제 영화제라 일컬어지는 칸, 베를린, 베니스를 석권하면서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려 온 감독이지만, 사실 국내에서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죠. 그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접하기는 커녕 타이틀조차 모르는 관객들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경주>가 그를 조금이나마 친근하게 만들어 준 것은 다행인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문제는 <경주>에 대한 관객들의 입소문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장률" 감독에 대한 이야기들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솔직히 작품 <경주>는 그럴만 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독의 성향 자체가 기본적으로 친대중적인 지점에 놓여있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시네필들의 마음을 흔들 정도로 선이 굵고 진한 여운을 남겨온 그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영화 <경주>만큼은 모호한 부분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모호하다'는 것은 정말 단어 그 자체로도 모호한 것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표현이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만, "장률" 감독의 모호함은 적어도 스스로의 개연성을 무너뜨리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경주>를 만들면서 "장률" 감독은 자신이 1995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지인을 따라 갔던 경주에서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영화 속에 상당부분 담아냈다고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두 번째로 방문했던 아리솔이 변해있던 모습에 느끼게 된 감정들이 영화 속에 담겨져 있다고 말이죠. 아마 이 지점이 영화 <경주>를 '부정적인 모호함'으로 이끌어 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속에 너무 개인적인 감상들이 표현되고 만 것이죠. 감독의 해석이 담긴 시선이 아니라 말입니다. 어쩌면,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 옳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는 "예리"(한예리 역)라는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녀의 가까이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녀가 한국이라는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면서 이제는 병들어 버린 아버지(이준동 역), "예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의 아들이면서 간질을 앓고 있는 남자 "종빈"(윤종빈 역), 6개월이 밀린 월급조차 받지 못하고 항상 고개만 숙이고 다니는 탈북 남자 "정범"(박정범 역), 그리고 이제는 별 볼일이 없어진 동네 건달 "익준"(양익준 역)까지. 어쩌면 "예리"는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그녀를 향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녀의 곁에서 유일하게 동성의 역할을 맡고 있는 "주영"(이주영 역)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담은 연서를 보낼만큼 그녀는 어떤 의미로는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읽어주세요 한 번만..
그런데 이상합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예리"입니다. 그녀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은 그녀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존재들이죠. 그녀는 "종빈"이 발작을 일으키면 우유를 가져다 주고, "정범"이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꺼내들자 물을 준비합니다. 매일처럼 아버지의 병수발을 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영화관에선 "익준"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려 쫓겨날 처지가 되자 그의 입을 키스라는 행위를 통해 막아주기도 합니다. 결국 쫓겨나기는 했지만. 이 장면에서 두 남녀의 연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그 키스라는 행위가 그에게 사랑을 느낀 그녀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결점을 감추어주기 위한 그녀의 희생 정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그 많은 기대와 감정들이 마치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감내해야 했던 업보라도 되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만 합니다. 단 한 번도 언짢은 내색을 표하지 않죠.
어떻게 보면 이 '고향주막'을 찾는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떤 결핍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정신적이든 신체적인든 상관없이 말이죠. 영화를 이끌어 가는 "종빈", "정범", "익준", 세 사람을 차치하고서라도, 칼을 들고 술을 마시던 사람, 바이크를 몰고 다니던 "예리"의 핸드폰 속 그 남자까지도.. - 그와 함께 가게를 나선 "예리"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겐 어떤 결핍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이 영화 속에서 그들의 결점이 영화에서 어떤 문제로 비화되거나 언급이 되는 부분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심지어 DMC(Digital Media City)가 건너 보이는 옥상에서 술을 마시던 세 사람은 왜 하필 저 곳이 아니라 수색역 쪽에 집을 사 두었냐는 물음에 대해, "종빈"의 아버지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예리"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비이성적인 대답을 내 놓으며 만족스러워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영화 속 '고향주막'은 '결핍'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이 영화 속 수색역 세상에서 '결핍'이란 조금도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든요. 다만, '결핍'이 아니라 '결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결코 '고향주막'의 문이 열려 있지 않습니다. 소주를 4병이나 마시고 안주까지 시켜놓은 두 남녀. 술에 취해 있기는 했지만 "예리" 앞에서 세 남자의 뒷담화를 하다가 그 길로 쫓겨납니다. 글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보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결점' 때문이지요.
그녀가 꾸려나가는 '고향주막'을 경계로 '결핍'과 '결점'의 이야기가 성립되는 지점에는 "주영"이라는 인물이 서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예리"는 "주영"에게 직접적으로 성적 행동을 당하기도 하고, 연서 한 장을 받아들기도 하지만 그녀가 동성애자라고 거리를 두는 행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연서를 읽고 난 다음에는 어떤 정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이의 안타까움이 엿보일 정도였습니다. 많이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을 현실과 영화 속 '고향주막'의 "예리"는 대비됨과 동시에, 그런 "예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주영" 역시 편견 없는 공간에서 '결점'이 아닌 단순한 '결핍' -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결핍 - 을 가진 인물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유명한 시가 떠오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을 때야 우리는 그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군가의 꽃이 될 수 있는거겠죠.
다시 "예리"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백두산 천지에 가봤냐고 묻는 "주영"에게 그녀는 '천지는 못 보고 그 안에 고인 물만 만지고 왔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운이 나빴다구요. 여기에서 그녀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조금 더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이 아닌 다른 장면에서 그녀가 운이 없다는 표현을 직접 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왜 그 모든 순간들에서 그녀가 관조적인 태도로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 지 알겠습니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래서일까요? 사실 저는 "예리"가 "정범"이 떼인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돈을 받아낸 것은 "예리"가 아니라 "종빈"의 간질 증세였지만, 자신의 것들에는 그렇게 초연하던 그녀가 "정범"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던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대신한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녀가 추는 이름모를 춤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면 아마 그런 모습이겠지요. 어쩌면 DMC라는 공간과 대비되는 수색역의 모습이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성공을 쌓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 위한 공간.
이 작품의 타이틀이 <춘몽>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률" 감독은 영화 내내 의도적으로 꿈인지 아닌지 모를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그게 누구의 꿈이었는 지 생각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에서 "정범"의 북한 여자친구가 등장하면서 영화 속에 등장했던 이야기들이 모두 현실이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네 사람이 '고향주막'에 둘러앉아 "정범"의 여자친구를 이야기 할 때, 언제나 그랬듯, 그의 말을 믿어주는 이는 "예리" 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정범"에게 그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겠죠. 아니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습니다. 계속해서 표현되고 있듯이 세 사람의 관계 속에서도 "정범"은 가장 아래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범의 여자친구였다는 그녀(신민아 역)가 등장함과 동시에 정말 "정범"의 거짓(꿈)인 줄 알았던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이 장면에서 한 번 레이어(Layer, 층)를 형성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흑백영화로 그대로 끝나게 된다면 말이죠.
나도 바보 같은 짓 안 할테니까 아저씨도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사진관에서 네 사람이 사진을 찍고 나온 뒤에 "예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예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 작품의 결말을 위한 과정 자체를 두 가지 갈래로 나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그녀의 감정을 영화의 러닝타임 그대로 이어나가 봅시다. 그녀는 골목에 있던 낡은 장농 속에서 기도를 하고 나와 우연히 마주친 "익준"에게 나도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을테니 아저씨도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라는 이야길 합니다. "익준"이 하게 될 바보같은 짓에 대해서는 영화 속 두 번의 당구장 장면을 통해 언급된 바 있으니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예리"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어두운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겠죠. 그리고 자신이 하게 될 바보같은 짓. 그것은 아마도 자살이었을 겁니다. 러닝타임 내내 그녀는 힘들어 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이죠. 특히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무기력했습니다. 점집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조금 더 오래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안도하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 오토바이 남성(유연석 역)이 '고향주막'을 찾아온 것은 어떤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함께 삶을 마무리 하는. 그런 메시지. 미리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 또한 우연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영정 사진이 보이는 순간을 기점으로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감 있게 바뀌는 것은 "미셸 공드리" 작품의 <무드 인디고>(2014)의 그것처럼 어떤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 영화의 화면이 전환되는 것은 그 이전까지의 흑백 장면들 모두가 이 세 사람의 꿈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향주막'이라는 동네 술집에서 밤을 샌 세 남자가 현실 속 '결점' - 여기에서는 결핍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현실 속 자신의 결점을 모른 척 하기 위해 술잔 속에 "예리"라는 가상의 여성을 만들어 낸 것이니까요. - 을 잊기 위해서 술에 취한 채 자신들의 소망 같은 것을 담아 세상에 없는 가상의 여성, "예리"를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꿈 속에서 "예리"의 아버지로 나왔던 사람은 아마도 그 주막의 주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꿈이 깨어지자 휠체어를 털어내고 일어나 걸어가는 걸 보면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의 해석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접근금지'라는 팻말이 유독 더 커 보이는 발전소 담벼락 앞에서 "종빈"과 "익준"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말이죠. 이 해석대로라면 결국 앞의 흑백 장면들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이 영화의 원제가 <A Quite Dream>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겠네요.
하지만 그 어떤 방향도 이 영화의 '모호한' 환상을 깨어내지는 못합니다. 어느 쪽이든 그 환상 속의 이야기가 너무도 아름다워서 영화 속 그들에게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인듯 꿈이 아닌 꿈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춘몽>은 "장률" 감독이 자신의 감정만을 오롯이 쏟아냈던 영화 <경주>에서부터 완전히 빠져나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모호한' 느낌을 아주 잘 담아낸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영화의 마지막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그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언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무엇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그런 하룻밤의 꿈과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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