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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Feb 23. 2017

#099.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지켜내기 위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것들.




**넘버링 무비의 모든 글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01.


누군가에게 죄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 동안이나 그에 대한 값을 치르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만일 그 죄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해 놓은 수위 내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적절한 수준의 대가인지에 대한 문제는 남겨두더라도, 산술적으로 계산 정도는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지점의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의적이라고 부르는 수준의 문제이거나, 어느 한 개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 스스로에게 짊어지게 만들어 버린 문제들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런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한 남자. 그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문턱을 넘으며, 그 동안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나 온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02.


영화는 시작과 함께 주인공인 “리 챈들러”(케이시 에플렉 역)의 모습을 뒤따릅니다. 자신의 고향인 맨체스터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있는 보스턴이라는 도시. 그는 그 곳에서 혼자 지내며 아파트 관리인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쁘지도 않은 생활의 연속.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딱히 열정을 갖고 있거나, 이를 통해 자신의 어떤 미래를 그려본 적도 없어 보입니다. 시시콜콜한 잡일이 끝나면 마을 구석에 위치한 펍으로 달려가 농을 걸어오는 여자들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그런 자신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내놈들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일까요? 그는 자신의 삶을 딱 그 언저리에 위치해 놓은 뒤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03.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그에게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이었던 형, “조 챈들러”(카일 챈들러 역)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인은 심장마비. 형은 원래 심장이 약해 몇 번이나 쓰러지곤 했었습니다. 그 때마다 형이 살고 있던,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이 도시 맨체스터를 찾아와 조카인 “패트릭”(루카스 헤지스 역)을 돌봐주곤 했었죠. 어쩌면 그가 고향을 떠나면서도 더 먼 곳으로 가지 못한 것은 그런 형이 갖고 있던 문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그 때만큼은 꼭 그 곁에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영화는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왜 “리 챈들러”라는 인물이 자신의 고향을 그렇게 견디지 못했는지, 또 가족들의 곁을 떠나야만 했는지를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습니다. 인과관계를 설명하기보다 그저 그가 움직이는 대로 바라만 봅니다.


04.


고향으로 돌아와 형의 죽음을 확인한 그는, “조 챈들러”의 죽음과 관련된 일들을 빠르게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조금도 이 도시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입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홀로 남은 “조카”의 삶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린 조카 대신 어른인 자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죠. 그래서 일까요? 장례 절차와 관련해 조금도 “패트릭”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도 묵묵부답, 배도 팔아버리려고 하고, 형의 시신도 돌아오는 봄이 될 때까지 냉동고에 넣어둘 생각이랍니다. 아버지의 시신을 그렇게 넣어둘 수 없다고 “패트릭”이 소리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해결해야 하는 수 많은 일들을 직접 열거하며, 하고 싶으면 직접 해보라고 소리칩니다. “패트릭”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간섭하려 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패트릭”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밤에 집에서 재워도 되겠냐고 묻는 말에도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시큰둥하게 그러라고 합니다. 저는 그의 그런 모습이 무언가 모순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의 의견을 묵살해가면서까지 해결하려고 하고, 그 외의 것들은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생활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는 모습. 물론 영화 속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기는 합니다. ‘아빠는 어떻게 했어?’ 이 장면을 두고 “리 챈들러”의 입장에서 형인 “조 챈들러”가 아들을 교육하던 방식을 따르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까지 “패트릭”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장례 절차 상에서 그가 원하는 것들도 들어줬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I can't be his guardian..


05.


그가 갖고 있던 진짜 문제는 형의 재산 상속 문제로 찾아간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형의 재산 상속이 당연히 그의 아들인 “패트릭”의 이름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이름이 그의 대리인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 “리 챈들러”는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리고 맙니다. 자신이 그 동안 치열하게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 악몽 같은 순간을 말이죠. 이 장면에서 그가 떠올리게 되는 과거의 사건 시점과 현재의 시선이 교차되는 부분은 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앞으로 남은 러닝타임 동안 나아갈 방향을 암시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인 감정의 표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사실 내용 상으로만 따지자면, 이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절정)에 해당됩니다. 주인공의 행동을 설명하는 동기와 그 실마리가 표현되고 있는 장면이죠. 이 부분을 통해 관객들은 “리 챈들러”라는 인물이 형의 죽음 이후 왜 자신의 고향 맨체스터를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지, 그 동안의 시간을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일반적이라면 이런 지점의 내용들은 영화의 후반부에 배치되어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부여 받게 됩니다. 그 방법이 극을 치닫게 만드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장면을 그렇게 느껴지지 않죠. 앞서 이야기 했듯, 이 작품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보여주고자 하는 지점은 내러티브의 폭발을 통한 감정적 공감이 아니라, 관조적인 태도를 견지한 상태에서의 이성적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시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 속 인물들에게 밀접하게 다가가지 않고, 관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또한 동일합니다.


06.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스턴에서 그의 삶이 어땠는지 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맨체스터로 돌아 온 이후 그는 과거에 자신이 묻어두었던 기억들과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무력해집니다. 그가 맨체스터를 떠나 보스턴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은 과거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종의 속죄라고 보는 게 가장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어떤 무력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라는 생각도 저는 듭니다. 사고가 일어난 직후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아내를 따라 가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며, 그런 자신에게 죄가 없다며 집으로 돌아가라는 경찰들의 이야기에 조금도 수긍하지 못한 채 권총을 집어 뽑아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는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그 몸부림이 처음에는 부정적인 태도로 드러나다가 조금씩 현실적인 방안들을 찾아가는 것이죠. 제가 이 글의 서두에서 처음 제기했던 물음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만약 그의 행동을 두고 어떤 법적인 조치가 취해졌더라면, 그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그 몸부림의 정도가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요?


랜디가 사과를 할 때 자세히 보면 미셸 윌리엄스의 목이 시뻘개지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 몸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뜻이죠.


07.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그의 아내였던 “랜디”(미쉘 윌리엄스 역)라는 인물 또한 자신의 거짓말 같은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독한 노력을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사고를 겪은 이후에 다른 남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또 다른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심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 일이 벌어진 것이 남편인 “리 챈들러”의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서로 연락을 끊고 지냈던 그 시간 동안 “패트릭”의 가족들과는 최소한의 교류를 하며 지냈던 것이고, “조 챈들러”의 슬픈 소식에 먼저 연락해 왔던 거겠죠. 길 위에서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에서 “랜디”가 “리”에게 미안했다고 이야기 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그녀가 계속해서 “리”를 만나고 싶어했던 것이 어쩌면 그녀가 그를 밀어냈던 시간 동안 그가 혼자 짊어지고 있었을 그 과거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힘든 시간을 겪어왔지만, 이제 나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 너도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괜찮아. 라고 말이죠.


08.


다시 잠깐 돌아 와서,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은 “패트릭”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영화 속에서 부자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지만, 장면들 사이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대사를 통해서 두 사람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삼촌, 아빠랑 나는 아무런 비밀이 없는 사이었어.’라는 대사는 그런 성숙한 아들 – “리”의 자식들은 모두 어릴 때 죽었으니까요. – 을 둔 적이 없었던 “리 챈들러”로 하여금 ‘그럼 이럴 때 콘돔이라도 사용하라고 이야기 해야 되니?’라는 대사를 이끌어 내게 할 정도로 생소한 부분입니다. 아버지 “조 챈들러”의 죽음 이후에, “리 챈들러”가 설명하고 있듯이 “패트릭”은 겉으로는 조금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사실 그는 행동들에는 과거의 상처들이 묻어있습니다. 알코올중독자로 어릴 시절 자신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어긋난 상태로 여성에 대한 소유욕 또는 집착으로 변질되어 어떻게든 하룻밤 같이 사랑을 나누어보자는 욕구로 표현되고, 어쩌면 그런 외로움을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 오랫동안 연습이라도 한 듯, 삼촌이 묵살하는 자신의 의견 앞에 큰 목소리를 더는 내지 못하고 견뎌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패트릭”이 냉동고 앞에 서서 참고 있던 속내를 터뜨리는 장면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런 날 것의 감정 자체가 낯설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표현하는 그 감정을 일종의 ‘병’(공황장애)라고 얼버무리고 말지만, 그 감정은 분명, 그가 그 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어머니에 이어 자신을 먼저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슬픔, 아쉬움, 원망, 그리고 미안함 같은 것들이 혼재된 감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 동안 어머니와 몰래 연락을 주고 받았던 심정, 그런 어머니의 새 아버지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뉘앙스의 메일을 받았을 때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패트릭이라고 정말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을까요?


09.


I can’t beat it. 내재되어 있던 감정의 표출은 “패트릭”에 이어 “리 챈들러”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패트릭”의 대리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그는 맨체스터에 머물게 된 그 긴 시간을 모두 “패트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패트릭”은 “리 챈들러”에게 있어 과거의 자신을 마주할 것인지, 그렇지 못하고 과거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지를 결정하는 계기를 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패트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가 맨체스터에 남아 이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말이죠. 이 영화에서는 그런 “패트릭”이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는 부분이 두 곳, 마을의 펍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과 이 대사 I can’t beat it을 담담히 읊조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두 장면 모두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이 표현되고 있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의 마지막에 위치한 이 장면을 이야기하게 되겠죠. 이 영화가 “리 챈들러”라는 인물을 관망해왔던 흐름의 마지막 지점에는 자신을 무너뜨리고 상처 입히는 비극적인 표출보다 여전히 불편하지만 현재의 책임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나와 마주하는 긍정적인 표출이 더 어울리니 말입니다.


10.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 영화를 기다리는 내내 <블루 발렌타인>과 같은 작품에서 느꼈던 엔딩에서의 소름 끼치는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기 바랐습니다. 비록 그 감정이 너무 현실적이라 소름 끼치고, 지나치게 먹먹해지더라도 말이죠. 그래서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의 비관적인 과거의 사건이 등장하던 시점에서 조금 김이 새어버리고 말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오롯한 제 잘못이죠. 이 작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등장하는 배우들의 이름과 선재물(포스터)의 모습만 보고 쓸데없는 예측을 한 까닭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심정적인 동요는 크게 없었습니다만, 대신 영화가 끝나자 작품 속 인물들이 느꼈을 감정들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하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어떤 상처를 받고, 아픔을 느끼는 것은 동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꽤 인상적입니다. 불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관계를 날카롭게 잘라내지 않고, 자신이 처한 상태가 곧 무너질 것 같지만 다시금 일어나는 모습.


I can’t beat it. I can’t beat it. I'm sorry.


11.


현실에는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대로 두는 것과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는 것. 이 둘 사이에는 무엇이 되었든 차이가 생기지 않을까요? 아니. 설령 미래에 그 결과가 같을 것이라 여겨진다고 해도. 어쩌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맨체스터로 돌아온 그의 모습에서 그 답을 조금은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런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로를 전하고 있는 작품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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