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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14. 2015

#023. 봄

따뜻한 봄바람에도 아픔은 스쳐 지나간다.

타이틀 : 봄
감독 : 조근현
출연 : 박용우, 김서형, 이유영
러닝타임 : 102분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일 : 2014.11.20. (국내)




01.

"밀라노 국제 영화제"와 "마드리드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으며 해외 영화제 8관왕 석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그 작품성과 미술성을  인정받아 온 한국 영화가 하나 있었다. 물론 유수 영화제들의 상을 수상하는 것이 항상 작품의 깊이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국외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소식들은 충분히 반길만하고, 또 한 편으로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그런 영화 속에서 조용하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알려진 신인 여배우의 모습. 무척이나 궁금하다.


02.

먼저 이 영화의 감독인 "조근현" 감독은 전작인 <26년>을 통해 본격적인 연출을 시작한 신인 감독이다. 그 전까지는 <장화, 홍련>, <음란서생>, <형사 Duelist> 등의 다양한 작품들의 아트 디렉터 역할을 도맡으면서 화려한 색채감을 바탕으로 감각적인 재능을 표현해왔다. 이번 작품에서 역시 그는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그 어떤 작품보다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재현해 내는데 몰두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건 이전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그가 '빛의 쓰임'에 대해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조명은 최대한 배제한 채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전체적인 색감은 물론 영상 속 구도들까지도 군더더기 없으면서 상당히 감각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03.

처음에 언급했듯이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곳은 "이유영"이라는 신인 여배우의 존재다. 최근, '신인 여배우들은 데뷔작에서 노출을 피할 수 없다'라는 공식 아닌 공식이 스크린에 새겨지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이 작품 역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신인 배우가 <은교>나 <인간 중독>의 두 히로인들보다 훨씬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언뜻 "사유리"가 스쳐지나 가는 익숙한 마스크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좋은 작품들을 잘 만난다면 한국 영화 멜로계를 이어갈 새로운 다크호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04.

이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되면 자칫 예술과 불륜이라는 소재를 혼용한 이야기로 오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 두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 이 두 가지 소재는 과거에도 다양한 포맷을 통해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기존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이 작품 속의 예술과 불륜은 작품 속 내러티브의 중심이 되는 두 주인공의 미래가 없는 격정적인 불륜이라기보다는 한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근원이 되는 뮤즈에게 보내는 일종의 짝사랑에 더 가까워 보이도록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잊을만하면 이 부분을 건드려가면서 러닝타임의 처음에서부터 엔딩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경계를 쉽게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05.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여주인공인 "민경"의 인생이 너무나도 위태롭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데리고 낯선 남자와 하루를 살아가기도 급급한 삶. 그녀가 낯선 여인의 모델 제의를 받아들인 것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자신을 통해 예술을 창작해가는 "준구"에게 역시 그녀가 품은 마음은 고마움과 미안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녀가 그러한 마음을 넘어선 다른 연심을 품었다면 "준구"의 아내인 "정숙"의 품에 안겨 대성통곡을 하던 그녀의 모습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울음은 불륜으로 인한 죄책감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라, "준구"의 작품을 돕겠다는 처음의 순수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스러움과 함께 이 세상에서 어느 한 켠이라도 누군가 기댈 곳을 찾았다는 의미에서의 안도감의 의미가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06.

"민경"의 마음이 위 5번의 내용과 같다면 작품 속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준구"일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아마도 "민경"이 "근수"에게 처음으로 맞고 왔을 때가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그 감정이 "민경"이 다쳐서였는지, 영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신의 뮤즈가 다쳐서였는지는 정확하게 표현되고 있지 않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 "준구"였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폭행을 당한 "민경"을 위로하기 위해 품에 안은 "준구"는 그제야 자신이 "민경"을 작품을 창작하기 위한 대상으로 대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마지막의 "민경"의 말대로 "준구"는 자신의 작품에 표정을 새기는 행동으로 "민경"에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높고 깊은 욕망을 드러냈던 게 아닐까.


07.

이 두 사람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준구"의 아내인 "정숙"이다. 영화 내내 마음에 걸리던 인물이었는데 그녀는 결국에 가장 가슴 아픈 "봄"을 맞이하고 만다.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표현할 수 없었고, 작품 속 그 누구보다 복잡한 감정을 느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런 그녀였기에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오던 그 둑길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던 그 모습이 더욱 처연해 보이기만 했다.


08.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있다. 들을 수 없었던 순간에는 단 한 번만이라도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이지만 막상 그 말을 상대방의 입으로부터 듣게 되는 순간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삽시간에 밀려드는 후회와 안타까움 들을 견뎌내야 하는 그런 순간. 아마도 "준구"의 고백은 "정숙"에게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을, 또 그 기분을 조금도 가감 없이 표현해내는 "김서형"이라는 배우의 연기력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09.

물론 이 작품에도 아쉬움은 존재한다. 먼저 주연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세 인물 "준구", "민경", "정숙"을 제외하고 나머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너무 하찮게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앞서 설명했던 "근수"라는 인물은 "민경"과 "준구"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이어나가기 위한 트레일러의 역할만을 부여받고 있다. 또한 감독은 이 세 인물에게 "봄"이라는 단어가 주어지는 순간 각각의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고자 한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무 소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확히 표현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의미들을 찾아내는 관객들에게는 이 작품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관객들에게는 다소 밋밋한 작품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0.

많은 문학 작품에서 흔하게 표현되듯이 "봄"이라는 계절은 새로운 것들을 꽃 피우는 두근거리는 계절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미 지나가버린 "겨울"로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우리의 시간에 진한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계절이기도 하기에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봄바람에도 스쳐 지나간 아픔들이 스며들어 있을 게 아닐까.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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