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발견 2] 2022년 3월 7일 발행글
발생한 사건이나 사고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삶의 순서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역행적 상실’이라고 부르곤 한다.
본문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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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래빗 홀>은 현재 네이버 시리즈온, 티빙(TVing), 웨이브(Wavve)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전문은 하단의 링크를 통해 제공되며, 유료 콘텐츠로 제공됩니다.
순간보다 더 깊을
상실,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하여.
2019년에 개봉한 작품 중에 <하나레이 베이>라는 영화가 있다. 최근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감독 중 하나인 마츠나가 다이시의 신작으로 바다에 아들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홀로 남겨진 엄마의 모습을 뒤따르며 상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그려나가는 작품이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 어느 순간부터 상실이라는 단어는 꽤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꼭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닌데 지나고 나면 좋은 작품들 속에는 항상 누군가의 상실이 그려지곤 했고, 또 드라마가 조금 헐거워도 현실과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그 감정을 토해내는 배우의 연기를 보고 나면 함께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 작은 일본 영화가 그해 프랑스 남동부의 휴양도시이자 해마다 5월이면 세계적인 스타들로 가득해지는 칸의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보다 더 심장 가까운 곳까지 들어온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어떤 사건. 같은 영화를 두고도 저마다 해석이 달라지고 깊게 들여다보게 되는 지점이 달라지는 이유이자, 동일한 대상에게도 어느 때에 만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원래 오늘 소개하고 싶었던 작품은 그 결이 완전히 다른, 신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잊을 수 없는 영화들을 구해 모아놓은 외장 하드디스크를 뒤적거리다 이 영화 <하나레이 베이>를 다시 만나고 완전히 마음을 바꾸고 말았지만. 단순히 이 영화만 떠올랐다면 그대로 원래 생각했던 영화를 소개했을 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 영화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조명하는 지점이 다른, 매력적인 작품이 하나 또 함께 떠올랐다는 것이다. 덕분에 마음이 급해지고 실제로 서둘러 쓰게 되기도 했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가 그런 기분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순간에는 원래의 옹골찬 계획도 모두 뒤집을 수밖에 없는 계기가 생기곤 하니까. 대신, 원래 예정하고 있었던 영화는 언젠가 이 연재를 통해 다시 한번 소개할 수 있도록 하겠다. (하나레이 베이라는 작품에 대해서도 따로 이야기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어쩌면 오늘의 편지는 조금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이 작품 역시 앞서 설명했던 영화 <하나레이 베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맞닿아 있으니 말이다. 상실의 순간이 아니라, 상실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 남겨진 사람들이 상실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가슴에 품고 자신의 삶 속, 그 하나의 조각이 될 수 있도록 깎아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상실의 의미.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상실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상실(喪失). 흔히 쓰는 단어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단어이기도 하다. 표준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상실은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된다’와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이라는 두 가지 정확한 뜻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사전적 의미가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현실 속 상실의 순간에는 분명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겠지만, 존재에 대한 의미적 상실과 실재적 상실을 너무 엄격하게 분리해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상실이란 그 두 가지가 결코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실재적 상실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이후에 의미적 상실인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된다’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겠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게 될 ‘상실’의 의미를 좁혀 정의하자면, 그것은 곧 ‘타인의 죽음’이 될 것도 같다. 여기서 ‘타인’이라는 표현은 객체를 타자화시키기 위한 것일 뿐, ‘상실’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조금도 어려움이 없는 정도의 심리적, 정서적 친밀감을 형성했던 대상을 의미한다.
혹자는 실재적 상실 이후에도 의미적 관계가 지속되는 것의 증거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상을 먼저 떠나간 이들의 영혼을 기리거나 생전의 의미가 담긴 유류품과 같은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죽음이 곧 그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쪽의 의미만 생각하자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의미의 생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애석하게도, 실재적 상실 이후에 따라오는 의미적 상실에는 ‘관계’라는 것이 지워져 사라지게 된다. 사전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나. ‘관계가 끊어진다’고. 조금은 가혹하게 이야기하자면, 남은 자들이 세상을 먼저 떠난 이의 삶을 추억하고 기리고 하는 것들은 단순히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 자리에 감정의 교환이나 시공간의 공유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할 수만 있다면, 상실에도 순서가 있었으면 한다.
오늘의 영화 <래빗 홀>(2010)은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베카(니콜 키드먼 분)와 하위(아론 에크하트 분) 부부의 모습을 통해 사랑했던 존재를 먼저 떠나보낸 이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앞서 <하나레이 베이>의 이야기를 잠시 꺼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두 영화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이들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결을 갖고 있지만, 한쪽은 홀로 남겨진 이의 심리를 따르고 있고 또 다른 한쪽은 함께 남겨진 부모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또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두 작품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홀로 남겨진 부모의 모습이 그려지는 <하나레이 베이>에서는 그 대상의 ‘심리적 변화’가 중심에 있게 되고, 부모가 함께 비극을 겪게 되는 이 영화 <래빗 홀>의 경우에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관계의 변화’가 핵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관계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남겨두고 두 영화의 유사한 지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모습에 대한 부분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꽤 자주 활용되는 소재 중 하나다. 최근에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대상의 상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활용하는 것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기본적인 세팅이지만, 그 대상이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식의 일이 되면 그 감정이 더욱 깊어지는 경향이 있다. 발생한 사건이나 사고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삶의 순서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역행적 상실’이라고 부르곤 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상실의 종류가 ‘순행적 상실’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분명히 그 상실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대상에 따라 그 시기가 조금 빠르고 느리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연법칙에 따라 누구나 모두 맞이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때의 슬픔이 크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는 틈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역행적 상실’에는 그러한 여지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상실은 예외적인 상황에 속한다. 평소에 아무도 쉽게 예상조차 해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실을 표현하는 말 자체도 달라지곤 한다. 부모를 ‘떠나보낸’ 자식과 자식을 ‘잃은’ 부모와 같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할 수만 있다면 상실에도 순서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도 누군가를 잃는 경험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충분히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는 쪽에서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 흉터는 상대적으로나마 작아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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