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장면들 1] 2022년 3월 3일 발행글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이상하게 갈수록 이 영화 <봄날은 간다>가 사랑이 끝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너무 무겁고 짠하다. 모든 모양의 사랑은 반드시 어떤 흔적을 남기고 만다는 점에서.
본문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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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속에 등장하는 <캐스트 어웨이>,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는 현재 넷플릭스 등을 통해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전문은 하단의 링크를 통해 제공되며, 무료 콘텐츠로 무기한 제공됩니다.
무인도에 떨어진 한 남자가 있다. 회사로부터 긴급한 호출을 받게 된 그는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화물 비행기에 탑승한 참이었다. 비행 도중 폭풍우를 만나 계획되어 있던 항로를 벗어나게 되고 화물칸에서 어떤 폭발이 발생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추락하는 비행기와 망망대해 바다. 작은 구명보트와 높은 파도, 그리고 암초까지. 우여곡절 끝에 어떤 섬에 도착한 남자는 곧 생존자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0)에 등장하는 척(톰 행크스 분)의 이야기다.
무인도를 탈출할 동력을 잃은 후에 최소한의 생존과 안정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척이 그마저 실패하고 난 후에 낡은 배구공에 핏자국으로 얼굴을 그리고 윌슨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인간의 본질적인 두려움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장면이면서 이후의 스토리에서 척의 내면을 투영하는 대상을 탄생시키는 지점이니 말이다. 무리를 형성할 수 없고 무한한 시간을 사회적으로 소비할 수 없는 존재의 절대적 고독과 투쟁에 대한 의지가 윌슨을 통해 표현된다.
이 영화에서 윌슨이라는 존재의 탄생 순간만큼이나 눈길이 가는 대목은 중후반부의 두 장면이다. 평생을 이 썩어빠질 무인도에서 배구공 따위와 친구나 하며 지낼 생각은 조금도 없다며 윌슨을 던져버리고는 이내 정신을 차려 한밤중에 해변을 뒤지고 다니던 척의 모습. – 그는 윌슨을 찾아낸 뒤에 가련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반복한다. – 그리고 섬을 탈출한 이후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고군분투하다 잠이 든 사이 떠내려간 윌슨을 잃고 한참을 슬픔에 허덕이던 모습. – 그는 삶의 의욕마저 다 잃어버린 듯이 노를 바다에 버리기까지 한다. –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던 존재와 이별하고 난 뒤에 겪게 되는 감정의 그림자와 같은 것들.
이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경우에는 극한의 상황에서 일방적인 감정 투영이 일어나면서 그 대상으로부터 실제적으로 전달되는 감정적 교류나 동일시에 의한 행동의 전이나 학습 같은 것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척이 무인도로부터 구출된 이후 켈리를 만나 그간의 소회를 나누고 다시 이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는 하나 그 역시 오랜 세월의 공백으로 인해 희미한 그리움 정도로 희석되고 만다. 되려 윌슨과 영영 헤어지던 순간의 모습이 더 사무칠 정도다.
우리는 다양한 이별과 상실의 경험 뒤에 그런 유사한 감정의 총체를 경험하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단절에서 기인하는 관계의 붕괴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명확하고 다양한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던 모든 것이 추억이라는 단어 하나로 단순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련함이나 그리운 감정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또 어떤 것들은 과거와 동일한 상황이나 행동 속에서 이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상실감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감정을 일정 기간 이상 교환할 수 있는 대상 사이에서는 슬픔이나 그리움 이상의 어떤 흔적이 반드시 남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척이 윌슨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끈끈하고 복잡하다. 어떤 노력으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그 흔적을 모두 지워냈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 다시 또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것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에는 겨울에 만나 한 번의 봄을 함께 보내고 다시 돌아오는 봄에 이별을 맞이한 두 남녀에 대한 모습이 그려진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 분)와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인 은수(이영애 분)의 이야기다.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소리를 채취하러 동행을 다니다가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운 사이가 된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구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사랑도 한 번씩의 계절을 지나는 동안 짧고 뜨겁게 타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리고 만다.
[전문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