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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16. 2015

#030. 사도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사도 세자의 이야기.

타이틀 : 사도
감독 : 이준익
출연 :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김해숙
러닝타임 : 125분
등급 : 12세 관람가
개봉 날짜 : 2015.09.16. (국내)




**작품 자체가 각색을 통해 실제로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표현된 부분이 있는 바, 이번 글 역시 역사 적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가 아닌 작품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부분들을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01.

지난 2005년 겨울, <왕의 남자>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준익" 감독. 1,000만 관객 동원 달성과 동시에 수 많은 프로그램들은 영화 속 "공길"을 패러디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정도로 대단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이듬해 내놓은 <라디오 스타>(2006)는 관객들의 호평과는 달리 180만 명이라는 의외의 저조한 스코어를 기록했고, 이후 <님은 먼 곳에>(2008),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의 작품들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평양성>(2010)마저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면서 잠정 은퇴를 선언하기까지. 잠깐 빛을 발했던 '1,000만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02.

2013년에 영화 <소원>으로 영화판에 복귀하면서 "이준익" 감독 특유의 감성적인 코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평을 얻기도 했지만, 그 영화는 사실상 예산을 맞추기 위해 특정 캐릭터를 영화 전면에 내세우게 되면서 PPL 논란과 더불어 큰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로부터 또 다시 2년. <왕의 남자>가 개봉한 지도 햇수로 벌써 11년. 그 길고 긴 시간들을 돌고 돌아 그는 한국 역사 상 가장 비정했기에 슬플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사도>로 관객들 앞에 다시 한 번 섰다.


03.

"이준익" 감독이 다음 작품으로 그 유명한 '사도 세자'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 무렵, 그가 다시 한 번 사극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두근거리기 시작했던 건 분명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그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두고 보면 거의 대부분 작품들이 역사적 사건들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을 정도로 사극(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서 소재를 빌려온 작품)에 특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왕의 남자>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준익" 감독의 <사도>가 기대되는 부분은 이 작품의 장르가 사극이라는 부분보다는 <왕의 남자>와 매우 닮은 분위기의 작품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왕의 작품>에서 그가 보여준 인물들의 감정적 표현과 갈등을 풀어나가는 모습의 서사가 '영조'와 '사도 세자' 사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도 충분히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04.

그리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는 이 작품 <사도>가 "이준익" 감독이 자신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오롯이 담아낸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 작품이 <왕의 남자>와 같은 흥행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전작들 그 어떤 작품보다 묵직함을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대한 밝은 전망을 할 수가 없는 이유는 영화의 기승전결에 따른 클라이막스의 표현이 그리 극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뷰티 인사이드>의 04번 내용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이유로 <뷰티 인사이드>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것과 비슷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흥행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명량>의 '이순신'과 같은 맥락으로 '사도 세자'라는 인물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생각보다 높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05.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연출 상의 특징은 바로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히게 되는 장면을 영화의 가장 앞 부분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영조의 대리청정'이나 여러 번의 '양위파동', 그리고 '임오화변'에 대한 정확한 내용까지는 잘 모르더라도, 이 장면만큼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고 이 구성은 아주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얼마 전 SBS를 통해 방영되었던 <비밀의 문>을 비롯해 이 이야기를 다룬 대부분의 작품들이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 갇히는 것으로 엔딩이  마무리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선선하게 느껴진다.


06.

이 장면이 영화의 처음부터 공개됨으로 인해 이 작품은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구성을 시도하게 된다.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힌 뒤의 8일 간의 모습을, 매일이 각각의 시퀀스가 되도록 극 중 현재와 과거를 병렬적으로 배열해 놓고 있다. 이 교차하는 시퀀스들 속에는 '영조'와 '사도 세자' 두 사람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모든 인물들을 조명하며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으며, 기준을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인물의 이야기에 둠으로써 훨씬 더 넓은 내러티브들을 다루어내고 있다.


07.

이 작품의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기준이 시간의 흐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방식에 있다는 이야기는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 작품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데 집중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얽히게 되는 인물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데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된다. 특히 이 작품 <사도>에서는 주가 되는 '영조'(송강호 역)와 '사도 세자'(유아인 역) 두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사도 세자'의 아들인 '정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세대 간의 심리 차이, '사도 세자'의 할머니인 '인원왕후'(김해숙 역)와 '사도 세자'의 관계와 '영조'와 '정조'의 관계 사이에서 한 세대를 건너 뛴 인물들 사이의 감정적 차이까지도 세심하게 묘사해내고 있어 그러한 방식들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08.

한편 이 영화 속에는 극의 흐름을 다이렉트로 빠르게 가지고 가면서 판소리 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세 번 등장한다. 영화 <간신>(2014)에서도 이러한 형식의 장면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해외 작품들이 뮤지컬 형식을 갖고 있는 작품들을 내놓는 것처럼 우리 나라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이러한 형식을 차용할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인 부분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다만 표현되는 부분에 있어 차이점이 있다면, 영화 <간신>에서는 극의 진행을 이끌어가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반면, 이번 작품 <사도>에서는 특정 인물(사도 세자)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출해 내는 데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09.

이러한 장점들과 달리 다소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다. 영화의 초 중반에서 등장하는 약간의 가벼움. 작년 영화 <상의원>(2014) 때도 같은 부분이 아쉬웠는데, 이렇게 진지한 영화에서 굳이 그런 설정들을 넣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감독이 <왕의 남자>의 분위기를 떠 올렸다면 더 아쉬움이 될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왕의 남자>와 이 작품 <사도>는 사극이라는 장르만 동일할 뿐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0.

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했듯이 이 작품은 각색을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 즉 픽션(Fiction)의 영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알려져 있는 역사적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사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부터 모티브를 얻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몇 가지 사실들은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 관객들은 현재의 시각이 아닌 당시의 시각으로 이 작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 <사도>는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한 조선 시대의 예법 중시 문화와 더불어, 작품 속 인물들이 왕가(王家)라는 것에서부터 발생하는 군신 관계, 부자 사이의 특이한 심리 등을 이해하는 부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11.

먼저 작품 속 '영조'는 아집과 고집으로 점철된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자신이 직계 왕손이 아니라 천민 출신이라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되는 심리적 압박감과 함께 그 부분을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신하들과의 정치적 알력(軋轢)까지. 아마도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숱한 어려움들을 감내해 왔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뒤늦게 갖게 된 아들 '사도 세자' 사실 아들과의 관계가 처음부터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똑똑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욕심과 기대가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영조'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써 자신이 이겨내야 했던 많은 정치적 상황들을 자신의 아들만큼은 현명하게 처신할 수 있는 인물로 기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와 더불어 '예법'을 중시했던 '영조'에게 자고로 군자란 마땅히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아들 녀석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자기 주장도 뚜렷한 것이 소신을 굽힐 줄 모르고, 아버지인 자신의 눈치도 보지 않는 것이  그동안 자신을 대해 오던(자신의 약점을 두고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신하들의 모습과 달라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12.

물론 '사도 세자'가 '영조'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하는 건 '대리청정'이 시작되고 난 이후부터다. 처음 함께 편전에 나아갈 때만 해도 '영조'는 '사도 세자'의 옷 매무새를 직접 만져주며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는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 나올 때까지 단 한 번도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대리청정'이 시작되고 난 후 아들로 하여금 국정을 대신 일임하도록 하였더니 과거에 자신이 확립해 놓은 업적들을 전부 뒤엎어놓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임금인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조'라는 인물은 그리 현명하지 못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이 작은 계기는 이후 '사도 세자'의 모든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13.

그리고 이 때부터 '영조'는 지속적인 '양위파동(죽기 전에 자신의 왕권을 후계자에게 계승시키는 것)'을 통해 아들인 '사도 세자'의 충심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 장면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아들인 '사도 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의 이 제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은 아버지의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반역을 저지른 인물이 될 것이고, 그 이전에 '영조'가 왜 왕권을 자신에게 물려주겠다고 액션을 취하는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조' 역시 아들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는 왕위의 자리에 욕심이 없다'는 속에도 없는 이야기로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을 자신에게로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14.

반대로 '사도 세자'는 '대리청정'의 일을 포함하여 지속적인 '양위파동'까지, 자신을 라이벌로 생각하는 듯하는 아버지 '영조'의 행동에 점점 속이 썩어 들어간다. 배우며 자란 것이 '율법'이고, 아버지 '영조'는 친부이기 전에 이 나라의 국왕이기에 자신의 속내를 결코 드러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자란 것도 아니었다. 친모인 '영빈 이씨'(전혜진 역)가 후궁이었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그는 그나마 할머니인 '인원왕후'의 온기만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이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배우자로 맞이했던 '혜경궁 홍씨'(문근영 역) 역시 그 아들인 세자(훗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영조'에게서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15.

이러한 상황에서 할머니 '인원왕후'의 죽음은 '사도 세자'가  그동안 쌓아 온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안아주고 유일하게 지켜주었던 할머니의 죽음이 아버지 '영조'의 '양위파동'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는 아버지가 할머니를 죽인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간접적으로는 '사도 세자' 스스로가 할머니를 죽였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환갑은 모른 척하면서 새로 들인 '정순왕후'의 치맛폭에 놀아나는 '영조'의 모습을 보면서 '사도 세자'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도 세자'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분노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인원왕후'의 위패를 모신 자리에서 아버지 '영조'는 다시 한 번 이런 말을 하며 비아냥거린다. "그러게 네가 이 아비의 왕권을 순순히 받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니냐.."


16.

아버지 '영조'는 끝까지 모든 잘못을 아들인 '사도 세자'에게 떠 넘긴다. 이 장면 때문에라도 영화의 첫 장면에서 '사도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기 전 자결을 하라며 칼을 던지는 '영조'의 모습이 아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마지막까지 피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독백을 통해 이러한 과정이 역사 속 기록이 어떻게 남게 되느냐에 대한 결과를 바꾸기 위함이라고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나 '예법'을 중시했던 '영조'가 과연 그런 단순한 이유만으로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고자 했을 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17.

'사도 세자'가 활을 쏘며 아들인 '정조'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장면에서 그는 아버지 '영조'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 장면은 앞서 '사도 세자'가 어릴 적 '혜경궁 홍씨'와 혼인을 할 때 '영조'가 이야기를 하던 장면과 오버랩이 되기도 하는데, 이 때 '사도 세자'는 율법이나 규율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그가 아버지인 '영조'로부터 들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아들에게 전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18.

여기에서 잠깐 '사도 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앞서 한 번 언급했듯이 '혜경궁 홍씨'는 두 부자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아이인 '정조'를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하는 인물이다. 최악의 경우에 남편인 '사도 세자'가 죽어 왕후는 되지 못하더라도, 아들인 '정조'를 왕위에 올려 '대비'가 되겠다는 것. 어쩌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도 세자'가 세상에 홀로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은 것에도, 그렇게 궁지에 몰릴 때까지 행동을 멈추지 못한 것에도 분명 '혜경궁 홍씨'의 책임은 존재한다. 17번에서 '사도 세자'가 아들인 '정조'에게 말했던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이야기 속에는 분명 그녀에 대한 원망 또한 내포되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19.

점차 수위를 높여가던 '사도 세자'의 행동은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환갑 잔치를 독단적으로 벌이면서 극에 달하게 된다. 아들로부터 잔치상을 받는 어머니 '영빈 이씨'의 불안한 표정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미 환갑이 6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아버지이자 왕인 '영조'의 허락도 없이 잔치를 여는 것부터가 직접적인 반항의 행위인 것. 하지만 후궁인 '영빈 이씨'에게 '왕후'에게만 허락되어 있는 4번의 절을 올린 것은 실로 역심의 표현으로까지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이니, 이 장면은 할머니 '인원왕후'의 죽음 이후에 터져버린  마음속 울분을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낸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가마에 태우고 정신을 놓은 것마냥 휘적휘적 칼을 휘둘러 대던 그의 모습이 마치 <왕의 남자>에서 "공길"을 빼앗긴 "장생"의 모습과도 같아 보였다.


20.

이 장면에서 하나 또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은 훗날 '영조' 앞에서 이 때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았다던 어린 '정조'의 행동이다. 애초에 '정조'는 이 작품에서 매우 똑똑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할아버지인 '영조'를 대하는 모습에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앞서 언급한 할머니 '인원왕후'와 '사도 세자' 사이의 이야기가 다시 그대로 할아버지인 '영조'와 손자 '정조'의 이야기로 치환되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작품에서는 동등한 마음으로 진심으로 서로를 생각했던 '인원왕후'와 '사도 세자'의 관계에 대비하여 권력으로 인한 군신관계의 위치에서 할아버지 '영조'를 대하던 '정조'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21.

어린 '정조'는 자신이 할아버지 '영조'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이유가 좋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무서워서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조'는 아들인 '사도 세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손자인 '정조'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충심을 가려내기 위한 교묘한 말들로 시험하려고 든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도 세자'가 칼을 들었던 날, 왜 '인원왕후'에게 절을 네 번 했냐고 물었던 장면이다. 어리기는 했으나 그 힘의 역학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대답에 따라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던 '정조'였다. 이처럼 할머니와 '사도 세자', '영조'와 '정조'의 한 세대를 건너 뛴 각각의 이야기들은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이 작품이 3대에 걸친 심리적 차이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22.

과정이 어쨌든 그렇게 조금씩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사도 세자'는 역적의 모함을 받고도 자신의 무고함을 믿어주지 않던 아버지 '영조'로부터 살아 숨 쉬는 것부터가 역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밤 기어이 칼을 들고 임금의 처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아들 '정조'가 하는 말을 듣고는 칼을 떨어뜨리고 만다. "사람이 나고 예법이 났지, 예법이 나고 사람이 난 것이 아니라 배웠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예법이라 불리는 것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 '영조'의 목을 치지 못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고 멈춘 것이 아니라, 그 오랜 세월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예법'이라는 것, 그래도 '영조'는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이 반사적으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게 아니었을까?


23.

그래. 그렇다. 평생을 아버지가 외치던 '예법'을 몸서리치도록 싫어했던 아들 '사도 세자'는 그 빌어먹을 '예법' 때문에 손에 쥐었던 칼을 마지막 순간에 놓치고 말았지만, 반대로 '예법'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던 아버지 '영조'는 아들을 그대로 뒤주에 가두고는 8일 동안 굶겨 죽이고 말았다. 도대체 그가 외치던 '예법'은 누구를 위한 '예법'이었으며, 아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손수 서책을 옮겨 적던 손가락은 무슨 연유로 아들을 향한 칼을 쥐게 되었던 것일까?


24.

처음 '사도 세자'에게 할복을 명했던 '영조'는 자신을 만류하는 신하들에게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아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라며 노여움을 감추지 못한다. 어쩌면 '이준익' 감독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이 한 마디에 모두 녹아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 존재했던 당파 갈등도 이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고, 노론과 소론, 유생들의 모습도 단 한 번 언급된 적이 없었다. 대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야기, 그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만 남아 진한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25.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유아인", "송강호" 등 주연들은 물론 "정조"의 어린 역할과 "사도 세자"의 어린 역할을 연기한 아역들까지도 모두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다만 죽음을 맞이한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롱테이크 신의 "송강호"의 모습에서는 잠시 숨을 멈추었던 것 같다. 이 감정이 결코 '대단한 연기다', '압도적인 느낌이다' 등의 수식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보다는 그 장면 속에서 그가 뿜어내고 있는 어떤 감정이 분명히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떤 감정인지 특정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 있다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아들을 떠나 보낸 아비의 슬픔과,  그동안 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는지에 대한 회한과, 한 편으로는 그래도 끝까지 스스로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듯한 마음의 억척스러움까지.. 대단한 장면이었다.


26.

많이도 복잡하게 이야기를 나열해 냈다. 조금 더 간결하게 눈에 잘 보이도록 설명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움도 남는다. 그만큼 이 영화 <사도> 속에는 겉으로 보이는 '사도 세자와 뒤주'라는 소재 이면에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감추어져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흥행의 여부와 관계없이 <왕의 남자>에 이어 "이준익" 감독을 대표하는 또 다른 작품이 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로도 이렇게 풍성한 작품을 만들어 낼 줄 아는 것이 '이준익' 감독의 재능이라면,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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