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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Nov 04. 2023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

인디그라운드 큐레이션 리플레이 상영 1 : 시원한 바람, 선선한 마음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현장 보조 일을 하러 온 소이(김다정 분)는 슬레이터 일을 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영화를 찍곤 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감독 일을 하지는 않고 지금처럼 이렇게 아르바이트만 하며 촬영 현장을 떠돌고 있다. 준비를 하던 중 경민(김미은 분)이 이 작품의 배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소이. 그녀는 자신이 연출했던 단편 영화의 배우이자 연인이었던 인물이다. 약속했던 일을 촬영을 코 앞에 두고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 최대한 경민을 피해보려고 애쓰지만 배우와 카메라 사이에 존재하는 슬레이트 판을 들고 그녀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그녀 바로 앞에서 카메라 세팅과 동선 확인을 위한 가이드까지 해야 하는 소이다.


이 작품은 가장 먼저 타이틀이 눈에 띈다. 컴퓨터의 폴더 주소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모양의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이다. 풀어쓰면, 이동식 디스크인 ‘E 드라이브’ 안의 ‘말똥가리’라는 폴더 속의 ‘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안고 싶을 때가 있잖아.’라는 파일이라는 뜻. 뒤에 말 줄임표가 붙은 것은 주소의 길이에 비해 창의 공간이 충분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이 주소는 연출은 했지만 아직 한 번도 상영된 적이 없어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이의 영화를 의미한다. 실제로 영화는 이 상영본을 찾아가는 컴퓨터의 화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슬레이트를 들고 현장에 놓인 소이에게는 지금 한 가지 당장의 문제와 또 한 가지 지연된 문제가 존재한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경민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일과 계속해서 영화 일을, 정확히는 감독의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두 가지 문제는 모두 그녀의 부끄러움으로부터 발현된다.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아직 단 한 번의 상영조차 하지 못한 내 작품에 대한 창피와 여전히 자신의 꿈을 만들어가고 있는 경민의 앞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무안함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前) 연인이었던 그녀에 대한 복잡한 감정 또한 함께 존재한다.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경민에게 소이는 아무도 몰라주는 걸 한다고 사서 고생하는 게 자신의 팔자인 것 같다고 말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여러 종류의 부끄러움이 모두 내포된 말이다. 하지만 경민의 기억 속에는 누구보다 현장에서 열정적인 감독이었고, 또 자신을 사랑해 주던 모습으로 소이가 남아 있다. 그저 오늘의 현장에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다소 의외의 일이고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 몰라서 슬레이터 일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생소했을 뿐, 조금도 다른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왜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무언가가 소정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그 기억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마는 걸까.


이 영화 <E:/말똥가리/사용불가 좌석이라도 앉고 싶…>은 아직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한 이들과 무엇이 되지 못한 과거의 끝자락을 부끄러움으로만 안고 있는 사람들의 등허리를 가만히 어루만지는 작품이다. 비록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이동식 디스크인 E 드라이브에만 평생 보관해야 할 처지의 일이라도 그 시간 속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행복했다면 결코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경민의 대사가 이를 대신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별들은 다 과거의 별들인거래. 그러니까 우리는 별들이 과거에 빛나던 순간을 지금에서야 보고 있는 거야. 신기하지 않아?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별들은 어쩌면 지금은 너무 늙어서 사라져 버리거나 없어져 버렸을지도 모르잖아. 별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려면 우린 수 억년을 더 기다려야 해."


하나의 별로 완성되는 밤하늘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라져 버린 별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김선빈 / 한국 / 2021 / 12 Mins

김다정, 김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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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시원한 바람, 선선한 마음’ 중 한 작품입니다. 2023년 11월과 12월의 순차적 상영을 통해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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