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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Nov 15. 2023

홍, 재희, 나

인디그라운드 큐레이션 리플레이 상영 3 : 지정된 경로를 찾을 수 없습니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어린 시절의 우정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은 극히 일부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거나 사이가 쉽게 틀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의 관계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와 상황들로 인해 흩어지곤 한다.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거나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는 경우들, 당사자들의 선택과 결정이 아닌 외부적 요소의 개입으로 인한 이별이다. 헤어지는 동안에 우리는 관계의 종말을 부정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새로운 삶과 환경은 다시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중학생 친구인 홍(박소정 분), 재희(장해금 분), 영서(최수인 분)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물론 방과 후에도 언제나 함께 어울려 다니는 이들은 서로서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일 정도로 애틋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웃음이 터지고,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온종일 붙어 다닌다.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이 우정이 멈추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 사람이 자주 찾던 마을의 굴다리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마을이 재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다.


영화 <홍, 재희, 나>는 시간의 걸음 이면에 놓인 자리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지금 함께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만큼 자랄 수 있도록 했던 과거의 자리. 당시에는 영원할 줄 알았지만 어느샌가 힘없이 바스러져 버린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와 끝까지 간직할 수 없었던 순간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채감을 지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그 시절에 나와 함께 했던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기억함으로써 그저 덮어두기만 했던 자리를 판판하게 다시 고르고자 한다.


“여기 없어질 거래. 이 동네 전부 재개발할 거랬잖아. 굴다리도 막는대.”


방과 후 세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굴다리의 존재는 이들 관계를 반영하는 가시적 대상과도 같다. 이 작품 속에서 굴다리가 사라진다는 뜻은 세 사람의 동행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접근 금지 라인이 설치된 다음 날, 재희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만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이 마을의 재개발을 방해하는 이유라도 된다는 것처럼. 영서와 홍, 남은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오래 가지 못한다. 먼저 떠나간 재희의 속사정과 별개로 한 사람은 외고에, 또 한 사람은 상고로 진학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 사람의 이별은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두와 이별을 한 뒤에 영서는 홀로 굴다리를 찾는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찾지 않는 공간에서 그녀는 벌써 어제를 기억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별은 생각지도 못한 채 깔깔거리던 세 사람의 잔상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그 순간을 막을 방법은 없다. 붙잡을 여력도 없다. 이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굴다리의 내일과 벌써 헤어지기 시작한 세 사람의 내일 모두가 그렇다. 고요해진 굴다리 아래에서 그랬듯이 이제 그 기억은 작은 조각으로 남을 것이다.



김혜인 / 한국 / 2022 / 21 Mins

최수인, 박소정, 장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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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지정된 경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중 한 작품입니다. 2023년 11월과 12월의 순차적 상영을 통해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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