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그라운드 큐레이션 리플레이 상영 2 : 불확실한 벽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이들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랬다. 사랑과 꿈을 좇지만 이상향을 향해 날아가지 못하고 잠시 요동치던 날개는 꺾이고 말았다. 김미조 감독은 그런 갈매기의 이야기로부터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렸고 말한다. 자유로운 두 날개를 가졌지만 육지의 곁을 맴돌기만 하는, 결국에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마는.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오복(정애화 분)은 딸 인애(고서희 분)의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양가의 상견례를 가진 날 밤, 상인회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밤이 새도록 흥겨운 술자리도 가졌다.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셋째 딸 지애(김가빈 분)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아이를 둘이나 낳고 잘 살고 있는 첫째에 이어 인애까지. 세 아이를 번듯하게 키우기 위해 자신의 삶은 묻어둔 채로 참 열심히도 살았다.
이제 막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어둑한 아침, 홀로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는 오복의 모습이 이상하다. 어쩐지 자신의 뒤를 자꾸 돌아보고, 동네 목욕탕에 들러 몸을 깨끗이 씻고, 피 묻은 자신의 속옷을 무심하게 빤다. 가게 문도 열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 영화는 그런 오복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지만 지난 새벽에 어떤 일이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법하다. 영화 <갈매기>는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자신에게 벌어진 부정적인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나이가 적거나 많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일이 자신의 수치심과 연결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대부분의 것들은 자신의 부끄러움과 연관이 없거나, 그 부끄러움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다.
오복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일어난 성폭행을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삼킨다. 산부인과에서 검사받는 일도 혼자 감내하고, 멈추지 않는 하혈의 자국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감춘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밤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자신을 더럽힌 기택(김병춘 분)의 가게 수조에 소주병을 던져 깨보기도 하지만 그날밤의 사건은 여전히 살아남아 곁을 맴돈다.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 기분.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은 그저 지난밤의 숙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잔소리를 해온다.
그녀가 이렇게 홀로 속앓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해자인 기택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시장 사람들과 떠들고 웃으며 하루를 보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니 심지어는 오복의 집으로 전복과 문어를 한 상자 들고 나타나기까지 한다. 자신의 잘못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오복이 자신의 가족들에게 지난 밤의 일을 떠벌렸는지 감시라도 하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오복을 최대한 오랫동안 그녀 자신의 마음속에 가둬놓기 위해 두 가지 설정을 마련한다. 이제 곧 다가올 딸 인애의 결혼과 시장 사람들의 시위와 관련된 지점이다. 딸의 결혼을 앞두고 엄마 오복은 한없이 낮은 사람이 된다. 딸의 남자친구가 공무원이라는 사실 때문에라도 사돈 내외에 없어도 될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 여기에 자신이 시장 동료 상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딸의 결혼식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래도 이쪽은 아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추측에 불과하다. 사돈 내외가 좋은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오복의 아픔을 먼저 걱정할 것이다.
“한강에 배 한번 지나갔다고 생각해. 젊은 사람 발목 잡아서 좋을 게 뭐 있어.”
시장 상인들의 시위는 이미 시작된 행동이며 그들의 태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쪽에 놓여 있다. 시장과 관련한 부정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자신들의 보상금 문제 때문에라도 문제를 덮으려고 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아니 그전에, 시위 자체가 가해자인 기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복이 편이 되어 함께 싸워줄 이가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자신 대신 사과를 받아주지 않겠냐며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평소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동훈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시장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판이다.
실제로 얼마간의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에, 오복이 딸 인애의 도움을 받아 기택을 경찰에 신고했을 때에도 다른 상인들은 뭘 이렇게까지 하느냐며 다그치기 바쁘다. 그녀에게 일어난 그날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기택의 편이 되어 사과와 화해를 종용한다.
김미조 감독은 이 영화를 쉽게 화해시키지 않는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일들을 겪는 현실의 피해자들이 마주하게 될 현실의 문턱이 얼마나 높고 두터운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2차 가해의 그림자 역시 결코 그 범위가 좁지 않다.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성폭행 사건의 증거를 피해자가 찾고 증명해야 하는 것은 그나마 가벼운 쪽에 속한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나서지 않으려는 주변 사람들과 심지어는 피해자가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 쉽게 이야기하는 이들의 모습은 또 한 번의 상처가 된다.
엄마를 돕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엄마를 힐난하는 이야기를 쏟아내버리고 마는 딸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딸의 결혼에 자신의 문제가 걸림돌이 될까 감추고자 했지만, 딸은 자신의 결혼에 엄마의 문제가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탓을 하고 만다. 남편이라는 작자 역시 다르지 않다. 시장에서 떠도는 소문의 대상이 자신의 아내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여자가 잘못을 먼저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라는 비겁한 말들을 쏟아낸다.
영화의 중반부쯤에 오복이 혼자 학교 운동장에 앉아 엄마와 통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듯한 그녀의 엄마. 아직 딸에게도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는 왜 어릴 때 자신을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냐는 원망을 쏟아낸다. 그때 배워놓은 게 있었으면 지금 뭐라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바로 다음 신에서 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는 장면이 따라오는 것을 보면, 이 장면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오복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치매라는 병의 속성 앞에서야 그나마 그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제 제 땅을 두 발로 딛고 일어선 오복의 모습이 놓이게 된다.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김미조 감독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좋아하고 그 안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발견했기에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했지만 그 마지막 모습만큼은 바꾸고 싶었던 모양이다. 원래의 자리에서 날개가 꺾인 채로 바튼 숨을 내뱉는 갈매기의 모습이 아니라, 그런 날개마저 힘차게 다시 한번 움직이는 모습으로 말이다. 힘 있는 두 다리를 내딛고 비장한 눈빛으로 가해자 기택의 앞에 선 모습에 괜히 마음이 울컥해진다.
앞으로 남은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만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내일이 존재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엄마였기에 지킬 수 있었던 것들처럼 이번에는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
김미조 / 한국 / 2020 / 75 Mins
정애화, 이장유, 고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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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불확실한 벽’ 중 한 작품입니다. 2023년 11월과 12월의 순차적 상영을 통해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