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준 Feb 19. 2024

악몽

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1 : 인생은 편집이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붉은 밧줄에 양손이 꼭 묶인 채 매달려 괴로워하는 여자가 있다. 서커스단의 천막 안에 갇힌 그녀를 두고 수군거리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괴한 피에로 분장을 한 이들이 등장하고 그 모습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한 소녀가 차가운 이불을 들추고선 잠에서 깨어난다. 8살 유진(오지율 분)은 밤마다 종종 악몽을 꾼다. 다른 날에는 괜찮은데 유독 그 꿈만 꾸고 나면 이불에 실례를 하고, 오빠 유호(장호준 분)는 그런 동생이 이해되지 않는다.


“너가 쫄아 있으면 넌 계속 당하기만 해. 네가 전사라고 생각해.”


오빠의 조언대로 유진은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나름대로의 저항을 해보지만 그 용기가 단번에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다시 또 축축한 이불의 현실 위로 되돌아오고 마는 날들의 반복. 힘겨운 꿈의 밤과 차가운 현실의 아침을 오가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눈치를 봐야 하고 당장의 노력으로 막아지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엄마에게는 꼭 비밀로 해달라며 오빠에게 신신당부하는 유진. 그 마음이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서 맴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영화 <악몽>은 한 소녀가 무서운 꿈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이 담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을 연출한 한승원 감독 또한 연출의도를 통해 ‘폭력에 노출된 한 아이의 악몽 극복기를 서커스 판타지 액션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폭력에 노출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재는 이야기의 외면보다 조금 더 깊숙한 곳에 놓여 있다. 악몽이라는 표면적인 이유가 아닌, 어린 유진이 어떤 이유로 악몽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지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에 진짜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셈이다.


꿈의 일부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시 꿈 자체가 과학의 대상은 아니지만 외부 자극의 흔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영화도 유진을 중심으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잇는 작업을 시도한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며 어려운 가정환경에 놓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친구들의 따돌림과 아내는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가정 폭력을 가해오는 아버지의 존재는 악몽 속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으로 이양된다. 그런 문제들 속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지내온 스스로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처음에 이야기했던 오빠 유호의 조언과 응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무서운 꿈으로부터 벗어나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과 현실의 폭력과 가해로부터 함께 나아가자는 위로. 꿈이 현실을 반영하듯, 악몽을 이겨내는 힘을 갖게 되는 순간 현실의 어려움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직접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유호의 존재가 있어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진이 꿈속의 괴물을 모두 물리친 다음 날 아침, 초반부 내내 시리도록 차갑게 푸른빛을 유지하던 오누이의 방 안은 창밖으로 비치는 따뜻한 햇살로 처음 가득 채워진다. 엄마와 오빠가 있는 작지만 아늑한 현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현실 속 작은 성취가 유진의 미래를 따듯하게 품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함께이기에 우리는 나아갈 힘을 얻고, 그 길 위에서 또 한 뼘 성장한다. 이 영화가 작고 불안정했던 아이를 내일로 무사히 데려다 주었듯이.



한국 / 2023 / 19분 17초

감독 : 한승원

출연 : 오지율, 장호준, 박상민

_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첫 번째 큐레이션인 ‘인생은 편집이다’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2월 15일부터 2월 29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매거진의 이전글 접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