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1 : 인생은 편집이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화가 시간의 순서대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관객의 이해를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시간선을 옮겨다니기도 하고 그저 모호한 채로 두기도 한다. (아주 가끔 그 이해를 벗어나는 영화도 있다.) 시간의 길이도 마찬가지다. 러닝 타임 위에서는 1시간이나 되는 시간이 극 중에서는 1분 남짓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그 반대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시간은 감독의 생각대로 놓아줄 수도 붙잡아 둘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영화 <접몽>에도 그렇게 붙들린 시간이 있다고 믿는다.
영화 속 경주(김신록 분)는 5년 차 부부이자 시나리오 작가다.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허밍을 하며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뿐이다. 남편 민재(전석찬 분)와 함께 먹을 반찬을 사며 단돈 2만 원을 쓰는 일에도 온갖 핀잔을 들어가며 조금이라도 더 싼 가게를 찾는다. 고정된 화면과 흔들리는 화면 사이에 그녀가 놓여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현실의 삶이라 생각한다. 공모전에 제출한 시나리오는 또 한 번 퇴짜를 맞는다.
학원 강사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수입이 있는 민재와 그런 경주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가 놓이리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민재가 강요하지 않았더라도 5년이라는 시간은 경주 스스로를 아래로 끌어당기기 충분하다. 경주가 겨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실 바닥에 머리를 털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접시가 남편에 의해 깨진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갖는 일뿐이다. 그마저도 자신이 아니라며 되려 항변하는 그의 태도 앞에 뭉개져버린다. 두 사람 사이의 권력 구조는 말다툼이 일어나던 날 밤, 일어서 있는 민재가 경주를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영화적으로 그렇다.
영화는 모두 세 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그 경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화자를 경주로 놓는다면, 이는 분명 그녀가 살아오면서 혹은 어느 한 대상의 기억으로부터 떠올리게 될 가장 선명한 기억에 가까울 것이다. 이야기의 세 번째 구간, 그중에서도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화장실 신은 그래서 중요하다. 갑자기 등장한 여자(김은미 분)와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 경주의 상상 혹은 무의식이 직전까지의 20여 분 모두를 품는다. 아니 붙든다.
이전 두 구간에 등장하는 민재의 존재와 세 번째 구간 마지막의 민재가 같은 인물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는 동안을 모두 붙들지 못한다. 어떤 것들은 스스로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남게 되는 것들. 이 영화는 그런 것들을 위한 이야기다. 경주의 마지막 모습에 마음이 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시간 속에 놓인 자신의 모습과 그 시절의 태도, 닿지 않는 목표에 대한 서글픔. 현재는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글썽거리는 두 눈망울이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 현실과 꿈의 경계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곳에 자신이 놓여 있는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잘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글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으니까.”
유진목 감독은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집 <연애의 책>에는 동명의 시가 하나 수록되어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해당 시의 한 구절, ‘매일 밤 돌아오지 않는 꿈을 꾼다.’의 시각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몇 번을 다시 보고 또 읽어봐도 그가 말하는 장면과 문장 속에서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의 모습과 늬앙스가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덧없음을 알지만 쉬어 떠날 수 없는 존재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한국 / 2022 / 25분
감독 : 유진목
출연 : 김신록, 전석찬, 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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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첫 번째 큐레이션인 ‘인생은 편집이다’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2월 15일부터 2월 29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