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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Feb 22. 2024

알은 척 아는 척

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1 : 인생은 편집이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조각난 여러 장면의 합으로 인물을 설명하거나 상황을 전달하기도 한다. 각각의 장면은 러닝타임 곳곳에 흩어져 있기도 하고 특정 지점에 무리 지어 놓이기도 한다. 반복되는 상황과 사건이 강조의 역할을 해내면서 서브텍스트에 숨겨져 있던 의미를 드러내는 식이다. 이렇게 표식화된 인물과 사건은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을 부조리하게 만들었던 이전까지의 여러 동일한 상황 모두를 깨뜨리며 자신을 증명해 낸다. 영화 <알은 척 아는 척>은 이 구조에 정확히 부합하는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에 해당된다.


시봉(임경훈 분)은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지금의 학교 영화과로 편입해 왔다. 학과도 전혀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 비해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수업 내용이나 판서의 속도를 따라가기는커녕 자신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나마 조금 나은 것이라고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한 탓에 한국어 문법에 약한 교수(하준호 분)의 맞춤법을 지적할 수 있다는 정도다. 영화는 이 밀폐된 공간 내에서 그가 느끼는 묘한 이질감의 장면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거거든요. 중간에 있는 거.”


장면 하나. 교수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강의실 내 학생들이 키보드 소리를 투닥거리며 받아 적기 시작한다. 적어도 그들을 바라보는 교수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곧 이들의 등 뒤에 놓인 카메라로 시점이 옮겨가고 학생들의 노트북 화면에는 게임 화면과 인터넷 검색창, 메신저 등의 수업과는 관계없는 프로그램들이 떠 있는 모습이 담긴다. 청각으로는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지만 시각으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장면 둘. 오래된 영화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해당 작품을 본 적 있냐는 교수의 질문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영화과 학생이라면 꼭 봐야 하는 중요한 작품이라는 이야기에 이번에는 대부분의 학생이 손을 든다. 그중 한 학생에게 어땠냐고 묻는 교수. 마지못해 일어난 학생은 좋았다는 한 마디로 소감을 대신한다. 정말로 영화가 좋았던 걸까? 그 영화를 보기는 한 걸까?


장면 셋. 또 하나의 작품이 학생들에게 제시된다. 특정 사조를 대표하는 유명한 영화라는 소개와 함께 이번에도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손을 들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시봉 역시 함께다. 물론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교수의 눈이 그를 향하고 영화에 대한 소개와 소감을 발표하도록 요청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봉은 화장실을 핑계로 강의실을 도망치듯 나온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영화, 교수 자신은 수 백번은 더 본 듯 으스대던 작품은 필름이 전소되어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세 장면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몇 번의 장면, 그 모든 레이어를 한 공간에 수직으로 쌓은 뒤에 발생하는 하나의 작은 균열 속에 시봉을 밀어 넣는다. 그 틈 사이에서 인물은 홀로 정직하고자 했지만, 결국 정직하지 못한 존재로 남는다. 이제 더 이상 영화는 어떤 선택이 옳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단순한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의 선택이 무엇에 기대어 현실 위에 교환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만히 있으면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시봉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하지 못했던 행동을 이어나간다. 그 모습은 어느 때보다 격정적이다. 영화는 그를 어느 자리로 옮겨다 놓고 싶었을까? 잘못된 것을 알지만 함께 ‘아는 척’할 수 있는 무대 위의 자리일까. 아니면 ‘알은 척’ 혼자서라도 꼿꼿한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무대 아래의 자리일까. 결말은 그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위에 있을 것이다.



한국 / 2022 / 17분 29초

감독 : 이준우

출연 : 임경훈, 하준호, 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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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첫 번째 큐레이션인 ‘인생은 편집이다’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2월 15일부터 2월 29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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