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2 : 여기, 한국입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은 물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주기 위해 대상을 조금씩 움직이며 촬영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기법을 말한다. 정지하고 있는 피사체를 미세하게 움직이며 동작이 이어지게끔 만드는데, 보통 이때 촬영된 한 장의 사진을 프레임 하나로 설정하여 수 천장을 이어 붙여 하나의 영상으로 완성해 낸다.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 악몽>(1995)이나 <유령신부>(2005)가 여기에 속하며, 오래된 동유럽 작품 <패트와 매트>(1976~)도 여기에 해당된다. 다만 피사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조금 더 세분화된다.
단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어온 박세홍 감독의 <인형 이야기>(2022)도 여기에 속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오가는 형식을 빌린다. 영화는 감독이 직접 자신의 공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실의 장면이다. 그는 영화의 바깥에서처럼 영화 안에서도 스톱모션 작업을 한다. 작업대 위에는 몇 개의 인형과 그들을 고정시킬 스탠드, 카메라가 있다. 단출하지만 그가 상상하고 있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 뒤를 바라보던 시선이 작업대 위로 옮겨가며 인형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 속 장면이다. 영화는 그렇게 몇 번, 양쪽의 장면을 오가지만 극을 구성하고 있는 현실 장면이 애니메이션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301호의 문은 감독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인형의 세계 안팎을 위해 열린다.
가느다란 스탠드에 만들어진 인형을 고정시키고 매 장면을 하나하나 촬영한다. 매 초에 필요한 수십 장의 프레임컷을 모두 수작업으로 움직여가며 찍는 것이다. 음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이어 붙은 컷의 움직임에 맞춰 최대한 자연스럽게 후시 녹음된 사운드를 오버랩시켜야 할 것이다. 촬영과 편집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렇다.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인 인형과 그들이 살아갈 세상이 필요하다. 어떤 인형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다시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야기나 그 역할에 맞춰 새로운 인형을 만들기도 해야 한다. (동일한 인형도 다양한 표정을 만들거나 망가지는 경우를 대비해 추가 제작이 필요하다.) 배경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눈에는 금세 지나고 마는 하나의 장면조차 현실의 길고 긴 시간 위에서만 직조될 수 있다.
문제는 현실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감독과 그로 인해 함께 부산한 테이블 위의 인형들 사이로 예상하지 못한 균열은 언제나 있어 왔다. 대표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는 연락이 있다. 느리고 고된 작업을 담보로 하는, 그럼에도 완벽하게 매끄러울 수 없는 이 작업을 이 시대는 이제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빠르고 섬세한 컴퓨터 그래픽(CG, Computer Graphics)이 대세인 시대다. 대중은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캐릭터를 원하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애니메이션을 찾는다. 이는 극 중 애니메이션의 주요 캐릭터인 요괴와 나무꾼을 자신의 전작인 <요괴진격도>(2018)로부터 가져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극에서도 표현되고 있듯이,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현실적 한계 앞에서의 다양한 감정이 이들이 다시 한번 활용되는 상황 속에 담겨있다.
한숨과 함께 박 감독이 방을 나서고, 남겨진 인형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깨우며 본격적인 극을 시작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들의 모습 또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진다. 이야기적으로는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차용하고 있다. 극을 완성하기 위한 외형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이 작품 속 애니메이션 장면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스톱모션 애니메이터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노력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대상이자, 새로운 기술에 밀려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하나의 장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수단이다. 감독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물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박 감독 본인의 연기는 꽤나 어색하다. 전문 배우가 아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 <인형 이야기>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쪽은 조금 다른 지점에 있다. 이 작품이 간략하게나마 하나의 장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과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자신의 삶과 시간을 녹여 장르의 구멍 난 자리를 메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잊힌 자리에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숭고한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움직임과 멈춤으로 만들어진 장면들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어주기도 한답니다. 그것이 보람이고 또 그 맛에 하는 것이지요.”
이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선녀 인형이 등장해 판소리 버전의 ‘거위의 꿈’을 부르는 장면이 놓인다. 3분 정도 길이의 이 신에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고, 매 순간 완성된 장면을 상상하며 천 번이 넘도록 노래를 들어야만 했다고 한다. 작품 하나를 위해 1년 가까이의 시간을 고스란히 내어놓은 감독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이조차도 제작 기간이 처음 예상보다 줄어든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 작품을 통해서 보이는 것만으로도 현실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 상황은 앞으로 더욱 나빠져 갈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곱씹게 되는 이유다. 계속해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작게라도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여기에 남는다.
한국 / 애니메이션 / 2022 / 14분 25초
감독 : 박세홍
출연 : 원혜연, 진양욱 (목소리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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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두 번째 큐레이션인 ‘여기, 한국입니다’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3월 1일부터 3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