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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04. 2024

당신으로부터

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3 : 극장에서 쓰는 편지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극영화는 대체로 허구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만들어진 이야기의 시작점이 현실에 놓여 있거나 실제로 경험한 어떤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인물과 사건은 다시 재구성되고, 배경은 스크린 속으로 옮겨지는 순간 다른 세상의 것이 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대상이 현실의 어느 시점과 동일하게 존재하지 못한다면 실제와는 같을 수 없다. 모든 극영화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작품은 자신의 허리를 내어 현실의 일부를 담아내기도 한다. 여기에서 영화가 자신의 무엇을 내어서 담는다는 표현의 뜻은 풋티지나 클립 영상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말 자신의 이야기 속에 현실을 가져다 놓는 영화들이 있다.


신동민 감독은 감독 본인과 가족 구성원의 경험을 극영화 내부에 적극적으로 이식하고자 시도하는 인물 중 하나다. 첫 작품이었던 단편 <당신에 대하여>는 다큐멘터리의 화법에 가까웠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성남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와 변화해 가는 이미지 속에서 한 대상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두 번째 작품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는 극영화의 방식을 일부 차용한다. 세 개의 장으로 쓰인 이야기 속에서 영화는 한 인물의 삶을 투영함과 동시에 그 인물의 존재를 현실에서 드러내 새롭게 창조된 이미지와 혼합시키는 과정에서 관객의 시점을 교란시킨다. 영화에 현실을 이식하기보다는 현실에 영화적 기법을 섞어내는 듯 했다. 그리고 이 작품 <당신으로부터>에서 감독은 비로소 극영화의 물성 아래에 현실의 그림자를 떼다 꿰맨다. 움직이는 영화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현실. 나는 그것이 신동민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서사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 <당신으로부터>는 한탄강 언저리에 뿌려달라던 아버지의 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부탁을 수행하거나 간직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존재의 어깨너머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동안은 정면에서 바라봐 왔지만 이번에는 빗겨 난 자리에서 바라보게 될 사람, 엄마다. 그를 위해 두 개의 이야기와 하나의 사실이 놓인다. 모두는 이어진 듯 이어지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다.


02.

영화는 세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정확히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1부에서 언급된 이야기가 2부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등장하는 식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다르다. 1부에서는 졸업 전시를 앞두고 있는 의상학과 학생 민주(강민주 분)가 등장하고, 2부에는 배우를 꿈꾸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승주(이금주 분)가 놓인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는 동민(신동민 분)과 그의 어머니 혜정(김혜정 분)이 있다. 감독 본인과 실제 그의 어머니가 직접 카메라 앞에 선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마을 운천을 찾는다.


처음 이 작품을 마주하게 되면 1부와 2부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서로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1부의 민주가 엄마를 만나 과거 외숙모로부터 돈을 빌리고도 갚지 못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 장면(A)과 2부의 승주가 암투병 중인 외숙모를 만나 엄마가 빌렸다는 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A’)을 이어 붙이고자 하는 시도다. 다시, 1부의 민주가 후배 어진을 만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B)과 2부의 승주가 장례식장 복도에서 사촌 언니를 만나 아버지의 장례에 대해 말하는 장면(B’)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2부의 시작과 함께 1부의 민주가 아닌 낯선 인물 승주의 등장과 함께 모두 의미를 잃는다. ‘표현 그대로의 의미를 잃는다’기보다 ‘민주나 승주 한 사람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행위의 의미’를 잃게 된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극 중 민주와 승주의 이야기는 3부의 동민과 혜정을 위해 존재한다. 만약 3부가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앞서 존재하는 두 인물의 개별적 의미를 분명히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에 존재하는 세 개의 챕터가 순차적이거나 병렬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부와 2부는 그런 상태로 놓여 있을 수 있으나, 3부는 그렇지 않다. 3부는 앞선 두 이야기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더 큰 세상에 가깝다. 민주와 승주가 경험하는 세상의 뼈대는 동민과 혜정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두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 위에서 감독 모자(母子)는 다음 장면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03.

작품 전반에 놓여 있는 가장 짙은 감정은 상실에 대한 것이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상실의 감정 위에 서 있다. 허구와 실제 어느 곳에서도 그렇다. 막연히 슬프거나 애타게 그립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상실에는 막연한 수용의 태도가 일부 엿보인다. 그 대상이 사람으로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작게는 엄마가 내다 버린 미싱기에서부터 후배의 꿈과 사랑 같은 막연한 대상까지, 이제 갖기 어려운 아이에 대한 마음과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마음도 모두 포함된다. 나는 이것이 아주 오랫동안 깊이 들여다본 감정에서 비롯된 침착이라고 여긴다. 요란하지 않은 추모.


그런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곁에 놓인 누군가를,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곳곳에는 분명히 그런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다. 혼자 옷을 만들던 민주 곁으로 프레임 바깥의 동기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단순히 인물의 배경이나 행동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인 시간을 표현하기 위해 놓인다. 승주가 남자 친구와 함께인 장면도, 언니를 만나는 장면도 모두 동일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상실과 이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현재에 대한 수용. 우리는 모든 것이 영원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런 우리조차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기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버린 동민과 혜정의 옛 동네 운천이, 기둥이 내려앉을 정도로 스러져가는 옛 집이 그런 상실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조차 점차 어렴풋한 형태로 점차 멀어져 간다. 어쩌면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순간에서 만나게 되는 민주와 승주의 교환 역시 그런 경험에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을 관객에게 민주라는 존재를 상실하게 만들고 승주라는 새로운 환경을 이해하도록 하는 장치로 말이다.


04.

3부의 중반부에 나오는 관객과의 대화에는 꽤 의미 심장한 장면이 하나 놓인다. 그동안 막힘없이 대화를 이어오던 혜정이 ‘사랑이 뭘까요?’라는 마지막 관객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비록 이야기 내부의 인물은 공백을 남기고 퇴장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영화 전체가 그리고 감독 본인이 스스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앞서 못다 한 감독의 작업 방식 하나에 대해 더 말해야겠다.


이 작품의 3부에 등장하는 혜정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감독의 실제 어머니라고 말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신동민 감독의 모든 작품에서 직접 출연했고, 그가 바라보는 대상이 되었다. 이 글의 처음에서 각각의 작품을 소개하며 ‘그 대상’이라고 말했던 대상이 모두 그녀, 어머니다. 감독의 작품 속에서 ‘어머니’라는 실존 인물은 극영화의 물성에 현실의 그림자를 잇는 바늘과도 같은 존재이며, 현실 속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애정의 대상을 스크린 속에서도 동일하게 구현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된다.


그러니까 신동민 감독에게 영화는 그녀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투영해 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거나 거짓된 상황을 그려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난 두 작품과 달리 시선이 아버지를 향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존재를 뚜렷하게 다시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누군가를 통해 어떤 세상에서도 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서로 연결된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의 품 안에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05.

각각의 챕터 마지막에는 형태를 알 수 없는 원형의 알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한다. 민주의 시간 끝에도, 승주의 이야기 끝에도, 동민과 혜정의 여정 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대상을 추측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세 인물이 공유하고 있는 존재다. 각각의 챕터에서 이 기묘한 존재가 놓여 있는 물리적인 위치는 거의 끝지점에 해당되지만, 의미적으로는 가장 처음에 놓인다. 감독이 이 작품을 시작하고자 했던 이유와 내내 바라보고자 했던 대상이 아버지였던 것처럼 극 중 모든 인물 역시 자신의 이야기 시작점에 그가 놓여 있다.


이 이야기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 남겨진 것은 당신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삶은 상실과 이해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한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 안팎 모두에서 그렇다. 감독의 다음 작품이 어떤 모습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그의 내일도 영화를 따라 걸음을 걷게 될까?



한국 / 극영화 / 2023 / 101분 12초

감독 : 신동민

출연 : 강민주, 이금주, 김혜정, 신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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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세 번째 큐레이션인 ‘극장에서 쓰는 편지’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3월 16일부터 3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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