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주신경성 실신증 환자이다.
나는 미주신경성 실신증 환자이다. 밑도 끝도 없을 기절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까까머리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세상에 대한 반항으로 나는 머리를 빡빡머리로 밀었고,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나는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급 반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과연 일그러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과였고, 1학년 담임은 생물 선생이었다. 키도 크고 샌님처럼 말쑥하게 생기셨다. 당시 1학년 생물 시간 중에 혈액형 실험을 했다. 진단 키트에 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혈액형을 알 수 있었던 최첨단의 과학이었다. 그 문명 앞에 나의 운명은 서양 문물이 밀려들던 개화기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그동안 나름 폼 나게 살아왔던 일생의 근간이 흔들릴 법한 변혁이었다. 지금도 출신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와 중학교에서 생활기록부를 떼면 내 혈액형은 Rh+ O형이다. 평범. 그 자체였고, 호탕하고 붙임성이 좋은 굉장히 남자다운 성격이다. 그날 생물 실험이 아니었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실험 결과 내 혈액형은 B형으로 나왔다.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자기 고집이 세고, 함부로 말하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타입. 나에게 B형 남자는 조금 모자라거나, 삐지기도 잘하는 철부지일 뿐이었다. 내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별종이었다. 그런 내가 B형이라니. 실험이 잘못되었다고 선생님에게 따졌다. 가뜩이나 실험 교재가 부족했을 당시의 상황에 선생님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것도 모범을 보여야 할 반장이 아니던가. 두 번의 똑같은 실험을 마치고 나는 엎드려뻗쳐서 태도가 불량하다는 죄목으로 매질을 당했다. 그리고 수업이 마치자마자 가방을 챙겨 들고 전철역 앞에 있던 헌혈 버스를 찾아갔다.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단 조퇴였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디에서부터 바로 잡아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신념에 대한 문제였고, 국가 혹은 권력을 어디까지 신뢰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헌혈 결과 낙인처럼 나는 B형 남자가 되었다. 충분한 물을 섭취해야 피를 빨리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간호사의 친절한 미소가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음료수와 초코파이를 먹고, 헌혈 증서를 받아 들고 버스를 내리는 내 뒤통수에 대고, 간호사는 두 달 후에 또 헌혈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달 후에 다시 헌혈 버스를 찾았다. 그때도 역시 나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피는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검사가 잘못되었든지,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과 바뀌었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잘못 기록을 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과 바뀌었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O형 남자를 평가절하하고 살았던 것일까. 그에게는 B형 남자가 괜찮은 수준의 사람이었을까. 나의 헌혈 역사는 그 후로도 십 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아마도 쌓이는 헌혈증서의 수만큼 위급한 상황에서 내 생명을 살릴 수 있다거나, 강한 유대 관계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설득력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피 끓는 서러운 나이에 세상 여파에 더럽혀지고 있는 자신을 두 달에 한 번씩이라도 새롭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자신을 불태워 살지 못하는 사람의 참회. 자신의 전부를 태우고, 벌거벗은 나신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린 연탄재보다 못한 자신의 삶에 대한 가학이었을지도 모른다.
결혼하고 생일 기념으로 다시 헌혈 버스를 찾았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기절을 했다. 깨어났을 때 간호사들은 불량스럽게 웃고 있었다. 무슨 남자가 헌혈하다가 기절하느냐는 핀잔이었을 것이다. 아내도 덩달아 피식 웃고 있었던가. 두 달 후에 다시 찾았던 헌혈 버스 의자에서 세상은 뿌옇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고, 사람들 소리는 웅웅 거리고, 나는 다시 스르르 잠들었다. 내가 그 버스의 단골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이제 더는 헌혈하면 안 되겠다는 진심 어린 조언. 비로소 나의 온몸이 창백하게 변하던 순간에 대해 듣게 되었다. 핏기를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풀어졌던 눈동자의 초점에 대해서 그리고 병원을 찾아가 보라는 결론을 내렸던 생생한 증언. 어느 가녀린 청춘의 헌혈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 배경이다. 내 인생의 가장 값싼 인류애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조물주의 계시였을까. 기절, 뇌의 혈액순환 문제 또는 중추신경 이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 상태를 말한다. 좀 더 의학적인 용어로는 실신 또는 의식 소실이라고 말한다. 혈압이 떨어져 뇌로 충분한 혈액이 흐르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 일시적으로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이 소실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잠든 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그토록 몸부림치며 지키려고 했던 것과 신이 나에게 거두어 가려했던 것은 과연 같은 것이었을까. 기절하는 남자에게 허락된 피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피검사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