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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y 27. 2019

상처는 그날의 역사가 있다

아내가 먼저 나도 모르는 나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아내와 나는 교회에서 만났다. 아내가 스무 살에 처음 만났으니까, 오빠라는 소리가 입에 밸 법도 하다. 요즘도 가끔 웃자고 코 먹은 소리로 오빠를 부를 때는 동네가 자지러진다.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오빠였다. 친구의 집들이를 하러 갔다가 자연스럽게 ‘여보’라고 부르는 친구 부부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여보’라는 소리가 저토록 자연스러운 것이었던가. 하루는 진지하게 얼굴을 마주 보고 ‘여보’라고 부르는 연습을 하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여보’라는 소리가 우리는 지금도 낯간지럽다. 첫 아이를 낳고 어느 날부터 우리의 호칭은 아이 아빠, 엄마로 정리되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여보’ 소리가 안 나온다.


 “오빠, 여기 털 있어. 머리털 같아”

 “여긴 왜 이렇게 까매.”


 아마도 신혼의 특권일 것이다. 아내가 먼저 나도 모르는 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벌거벗은 뒷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의 등허리에 몇 가닥 머리카락처럼 긴 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내가 털을 잡아당기면서 신기하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아픔인지 부끄러움인지 모를 생소한 감각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내 몸을 자세히 살펴볼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고작해야 자고 일어나서 머리를 감을지 말지 결정할 때나 거울을 봤을까. 머리를 감고 나서 거울을 보고 빗질은 했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내 몸을 들여다볼 나만의 공간이 없이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부터 공사판에서 막일을 했다. 당시 집수리 일을 하시는 친구 아버님을 따라다녔다. 친구 아버님과 내가 일꾼의 전부인 작은 공사장에 일당을 받는 시다바리로 고용된 것이다. 나는 꾀를 부릴지도 몰랐다. 천성적으로 착함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던 것 같다. 바로 다음 날부터 일당을 올려주셨다. 벽이나 바닥을 부수고 나면 잔해가 남는다. 삽으로 푸고 담고 건축물 쓰레기를 치운다. 그리고 다시 벽을 쌓고 바닥을 미장한다. 벽돌과 모래와 시멘트를 등에 지고 나르는 일이 주업이고, 작업 도구를 가져오는 등의 잔심부름이 부업이었다. 친구 아버님의 능숙한 시범을 보고, 바로 등짐을 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었던 것은 젊음과 오기가 전부였던 것 같다. 등짐에 눌린 부위가 멍이 들고 피가 나고 굳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재수를 하고 군대를 갈 때까지 나는 공부를 했던 것일까, 노동을 했던 것일까. 등허리를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몸이 스스로 내렸는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등허리에 털이 자란 이유라고 추측한다. 등짐을 지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것이다. 이십 대, 나의 청춘의 몸은 노동으로 다져졌다.


 내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있다. 이마에 있는 작은 상처 하나가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내가 얼마나 인상을 쓰고 살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의 주름은 인상을 쓰는 만큼 깊어지는 것일까. 어머니의 포대기에 업혀서 입은 상처다. 기둥에 박힌 못에 살짝 찢겼다고 한다. 오른쪽 정강이에 있는 상처는 학교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생긴 상처다. 모래에 긁힌 자국이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각인으로 남았다. 왼쪽 팔뚝에 상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치기가 배어있다. 동네 슈퍼 앞에서 건달에게 돈을 빼앗기고 있는 친구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건달은 슈퍼로 들어가더니 맥주병을 들고 나와서 그대로 머리에 내리쳤다. 왼쪽 팔로 막았고 병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시절의 싸움은 피를 보면 끝났던 것 같다. 건달은 줄행랑을 쳤다. 병원에서 팔뚝에 박힌 병조각을 빼내고 스무 바늘 정도를 꿰맸다. 나의 뛰어난 운동 신경이 아니었으면 머리가 깨졌을 것이라는 말에, 아내는 자신의 운동 신경이었으면 피했을 거라고 했다. 아무튼 나는 동네 영웅이 되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아름다운 상처라고.


 상처마다 그날의 역사가 있다. 이마의 상처는 원망일 수도 있고 아련한 추측일 수도 있다. 그때 어머니는 무엇을 했고, 나는 무엇을 했던 가에 대한 수수께끼가 된다. 한 번씩 이마의 주름이 더 깊게 패보일 때면 어머니의 포대기에 업혀 있던 그 날의 행적을 따지게 된다. 오른쪽 정강이에 있는 상처는 후회와 난데없는 질책이다. 코너를 돌던 자전거의 속도와 운동장 모래의 입자의 크기와 날씨의 상관관계를 묻는다. 결국 그 모든 상황을 계산하지 못한 나의 운동신경이 둔한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왼쪽 팔뚝에 있는 상처는 불의를 참지 않고 오지랖을 떨었던 영광스러운 상처다. 불의를 피하는 것은 비겁하다. 기꺼이 맥주병을 맞는 것이 옳았다는 신념을 굽힐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산다. 상처는 결국 아물지만, 흔적을 남긴다. 피가 멈추면 굳고, 딱지가 앉는다. 상처는 모두 역사가 있다. 지나고 보면 상처는 모두 추억이 된다. 상처가 아물기까지 싸매고 보듬었을 안쓰러운 마음이 담겨 있다. 추억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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