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사에서 두 번째 회신이 왔다.
제출한 설문지와 이력서는 충분히 검토되었으며, 다음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내용이 첫머리에 있었다.
'그럼 서류 심사는 통과했다는 건가?'
'합격'이나 '통과'라는 명확한 표현은 없었지만, 분위기상 99%는 합격이었다.
좋았어. 이 기세로 최종 합격까지 가자!
다음 단계는 온라인 테스트, 프로젝트 자격시험(qualification exam)을 보는 거였다. 프로젝트 업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지시 사항을 잘 따르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채용 담당자는 자격시험이 앞으로 맡게 될 업무 일부를 직접 처리해 보는 작업형 평가이자, 업무 시스템을 익히는 훈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험에 응시하기 전에 따로 첨부된 프로젝트 지침서를 꼭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험을 보는 동안에도 지침서를 적극 활용하라고 조언했다. 처음 해보는 업무인 데다, 사전 지식이 필요한 일이라 헷갈리는 게 많을 거라면서.
자격시험은 테스트 안내 메일을 받은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완료되어야 한다. 응시 기한이 지나면 시험이 치러지는 웹사이트는 접속이 차단되어 시험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시험을 못 보면?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다.
'이번에도 쉽지 않겠는데.'
테스트 과정에 대한 설명 아래에 두 개의 링크 주소가 있었다. 하나는 프로젝트 지침서를 읽거나 내려받을 수 있는 웹페이지로, 다른 하나는 자격시험을 보는 웹사이트로 연결된다고 했다.
첫 번째 링크를 눌렀다. 웹페이지 화면이 뜨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흰 배경 한 가운데에 시뻘건 무언가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뭐야?'
화면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고서야 불타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Confidential. 기밀사항 또는 대외비(對外秘)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였다.
'경고 한번 살벌하게 하네.'
단어의 이미지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문서 표지 위쪽에 반듯한 글씨로 쓰여 있던 프로젝트 이름은 보지도 못했다. 나중에야 발견하고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보안이 중요하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자극적으로 표현할 일인가. 어쨌든 각인은 제대로 됐다. 지금도 글자 위로 치솟은 불길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지침서의 분량이 궁금했다. 응시 기간을 '7일 이내'로 한 이유가 왠지 여기에 있을 것 같아서였다. 마우스 스크롤 휠을 돌리며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찾았다. 휠을 돌리는 손가락이 멈추질 않았다. 결국 마우스 포인터를 화면 오른쪽으로 밀어 웹페이지의 스크롤바를 쭉 내렸다.
211.
마지막 쪽이 보여준 숫자에 입이 쩍 벌어졌다.
'211? 21이 아니고 211? 표지와 목차를 빼도 200장이 넘는데, 이걸 다 읽으라고? 그것도 일주일 안에?'
아, 이 회사는 왜 자꾸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
내게는 '불에 타오르는 기밀'보다 '읽어야 할 문서 211장'이 더 두려웠다.
그냥 포기할까.
얼마 동안 일하게 될지 모르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과 시간을 들이는 게 맞나. 이걸 읽을 시간에 스펙이 될 만한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기껏 노력했는데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억울함은 어떡할 건데.
쉽지 않을거라 예상은 했지만, 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도전과 포기 사이에서 고민했다. 도전하자니 버겁고, 포기하자니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까웠다. 답이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눈앞에 놓여 있는 마지막 페이지를 멍하게 바라보며 맥없이 마우스만 이리저리 휘젓고 있는데, 불현듯 '그래도 지침서가 어떤 내용인지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궁금했다. 대체 어떤 기밀문서이길래 그리 무시무시하게 경고했는지.
'그래, 궁금증 때문이라도 일단 구경해봐야겠어.'
문서의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목차'와 '프로젝트 목적'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 본문으로 넘어갔다. 본문 첫 장에서는 업무를 수행할 때 필요한 주요 용어와 개념을 설명하고 있었다.
'음, 이런 거였군.' '오, 이런 게 있네?'
내용은 의외로 흥미로웠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집중하게 했다.
서너 페이지쯤 읽었을까. 갑자기 문서에서 글자 수가 줄고 여백이 많아졌다. 작업 지침에 관한 설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과 그림, 표, 스크린 캡처가 꽤 많이 삽입되어서였다.
이미지가 많다는 건 그만큼 글자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뜻 아닌가.
'이런 추세라면 도전해 볼만하겠는데?'
그렇게 업무 지침서를 끝까지 읽었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생소한 영단어가 많고, 어떤 부분은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몇 번을 다시 읽어야 했다.
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두 번째 링크에 접속할 때가 됐다.
S는 테스트가 까다롭지 않다고 했었다. 나 역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떨어졌다.
또 말아 먹었네. 내가 전생에 국밥이었을까.
밥알 하나,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고 남은 뚝배기처럼 내 마음도 텅 비었다.
'뭐 때문에 떨어진거지? 어디에서 틀렸을까? 지침서 옆에 두고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했는데.'
며칠 동안 자격시험에만 매달려서 공부했던 게 헛수고가 됐다.
결과가 항상 노력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겉절이랑 깍두기는 남았네.'
외국 회사에 지원한 경험과 영문 이력서는 남았다고 애써 위로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반찬만 바라보고 있자니, 입안이 짜고 매워졌다.
서류 합격이라는 달콤함 뒤에 온 최종 불합격의 짠맛, 매운맛은 더욱 강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