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취업 준비생이 되었다.
취업 '진행 중'에서 '준비 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으니, 그에 맞춰 스펙도 리모델링에 들어가기로 했다.
테스트에서 도망치고 싶어 핑계를 댔던 '스펙 쌓기'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잠시 머물렀던 생각이 씨앗이 됐다. 말만 조심할 게 아니다. 생각도 주의해야 한다.
'우선 토익부터 손봐야겠어.'
L사 채용 담당자와 영어로 소통하면서, 영문 프로젝트 지침서를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비즈니스 영어는 또 다르구나. 토익을 제대로 공부할 걸 그랬어. 점수만 딸 게 아니라.'
토익 점수와 실전 영어 실력을 동시에 올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안고 영어 공부에 돌입했다.
어느 날, 공공도서관에서 잘 풀리지 않는 토익 문제를 두고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제집 위쪽에 놓여있던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면서, 새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잡코리아에서 보낸 거였다.
'보나 마나 또 광고겠지. 언제 또 마케팅 동의가 된 거...... 어? 이게 뭐지?'
"혹시 L사에 지원하셨나요? 이런 회사는 어떠세요?"
광고가 아니었다. 내가 관심이 있어 할 만한 회사를 몇 군데 추천하고 있었다. 잡코리아마저 알고리즘을 사용하는구나.
민들레 홀씨처럼 폴폴 날리는 개인 정보를 생각하면 반갑지 않았지만, 이왕 추천받았으니까, 개인정보 제공의 대가로 받은 거니까, 읽어는 보기로 했다.
최근에 지원한 회사가 미국 기업이라 그랬을까. 추천 목록에는 외국계 회사가 많았다. 목록에 나열된 회사를 눈으로 훑어 내려가는데,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A사였다.
스치듯 보면 '애플(Apple)'이라 착각할 만큼 이름이 비슷했다.
'이 회사 왠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어 봤다.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애플 때문이었나 보다.
눈에 띈 김에 채용 정보나 구경해보기로 했다. A사의 '채용 상세보기' 옵션을 눌렀다.
업종분류 IT.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할 프리랜서를 모집하고 있었다.
'뭐야, 여기도 IT야? 하긴, 알고리즘이 그렇지 뭐'.
더 읽을까, 말까. '하던 공부나 계속하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두 눈은 상세 요강을 떠나지 않았다. 시선이 '업무 소개'를 지나 '지원 자격'으로 넘어갔다.
'이 내용도 언제 본 것 같은데. 어딘가 익숙해.'
그때, 머릿속에서 한 단어가 반짝 떠올랐다.
'L사!'
A사의 채용 요강은 L사의 것과 꽤 비슷했다.
"얼마 전에 L사가 A로 회사명을 바꿨대."
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그렇지? 어쩐지 너무 똑같더라."
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A사가 '6개월'로 채용 기간을 한정한 것이 가장 큰 차이라면 차이였다.
L사의 자격시험에서 떨어져 아쉬워하던 때에 쌍둥이처럼 닮은 회사가 나타났다.
'두 회사의 채용 정보가 이 정도로 유사한 걸 보면, 채용 과정도 마찬가지 아닐까. 혹시 업무도 비슷한 거 아니야?'
그렇다면...... A사로 다시 도전?
좋아!
토익 문제집을 덮었다. 얼른 집에 가서에 A사에 지원해야 했다.
잡코리아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관심 기업'으로 저장해둔 A사의 채용 공고를 열었다. 본문은 이미 읽었으니 건너뛰고, 바로 '지원하기' 버튼을 눌렀다. 온라인 지원서가 금방 채워졌다.
이제 며칠 안으로 회신이 오겠지. 안 봐도 훤하다.
사흘 후, A사에서 이메일이 왔다. '이 회사도 영문 이력서를 요청하려나' 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본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설문 조사에 응답하고, 영문 이력서도 한 통 제출해달라고 했다.
커버 레터(cover letter, 간결한 자기소개서)도 제출하고 싶으면 이력서와 같이 첨부해달라고 한 것이 L사와 달랐다.
'대체 이 회사의 정체는 뭘까?' 의문은 더 커졌다.
A사의 비밀은 설문지를 작성하던 중에 풀렸다.
'보기에 있는 네 개의 회사와 일해 본 경험이 있나요?'
L사의 설문지에서 봤던 질문이 여기에도 있었다.
'어? 이거......'
그제야 기억났다. L사의 질문에서 A사가 보기로 있었다는 걸. 빙고!
퍼즐이 맞춰졌다. A사가 낯설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L사의 홈페이지에서 이미 두 번이나 봤기 때문이었다. '애플'과 이름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A와 L은 동종업계 경쟁사였다.
두 번째 회신이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프로젝트에 적합한 인재로 선정되셨습니다."라는 첫 문장이 나를 맞았다. 별거 아닌 인사말이지만 기분이 좋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면 먼저 테스트에 응시하여 합격해야 한다고 했다. 예상했던 내용이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시험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프로젝트 관리자가 24시간 이내에 따로 메일로 안내할 거라면서, "꼭 합격해서 함께 일하게 되길 바란다"는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어떤 회사와는 다르게 참 다정하다.
'고마워요. 저도 그러길 바라요.'
나도 마음속으로 답장을 보냈다.
다시 기회가 왔다.
만약 잡코리아의 메일을 받고 바로 삭제했다면, 평소 달가워하지 않던 알고리즘이라 무시했다면, 알고리즘이 A사를 추천하지 않았다면, 낯익은 회사명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면, 재도전 대신 예정대로 토익 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면, 내가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까?
모든 선택의 방향이 A사를 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운명이야. 내가 A와 일하게 될 운명.'
'최종 합격' 통보에 발을 구르며 기뻐하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생각만으로도 달콤하다.
곧이어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A사 프로젝트 관리자와 내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악수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L 사의 채용 담당자 여럿이 각자 팔짱을 끼고 우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 상상만 해도 통쾌해.'
인생은 묘하다.
어떤 일에 기뻐하면 머지않아 낙담할 일이 생기고, 좌절하고 있으면 다시 용기를 복돋아 주니까.
단짠단짠, 맵단맵단.
이런 게 인생의 맛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