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 3, 7: 내가 넘어야 할 세 개의 관문
프로젝트 관리자가 보낸 메일이 도착했다.
관리자는 테스트 진행 방식과 유의 사항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내용이 꽤 길고 복잡했다. 자격시험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어렵다.
A사는 L사보다 더 높고 두터운 취업 장벽을 둘렀다. A사에 입성하려면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세배만큼 어려워졌다. 내가 과연 이 거대한 장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럼! 나는 A사와 일하게 될 운명이거든.'
389
메일에는 프로젝트 안내서가 웹 문서로 첨부되어 있었다.
이번 안내서는 몇 페이지나 될까? 내용보다 분량 확인이 우선이었다. '211장'의 트라우마였다. 빠르게 마지막 페이지를 찾았다.
389.
"으악."
두 배 가까이 불어난 양에 망연자실했다.
'이건 업무 능력 테스트가 아니야. 인내심 테스트지.'
무조건 응시해서 합격하겠다는 다짐이 흔들거렸다.
3
자격시험은 총 세 번에 걸쳐 보게 될 거라고 했다.
'시험에서 떨어져도 두 번의 재도전 기회가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긴가민가해서 다시 읽어보니, 각각 다른 내용을 다루는 시험을 세 번 연달아 봐야 하는 거였다.
1차 시험은 이론, 2차와 3차는 실전 테스트였다. 한 차수라도 통과하지 못하면 최종 탈락이다.
만약 1차에서 떨어지면, 2차, 3차는 응시할 필요도 없이 자동 불합격이라고 했다.
'일할 사람을 뽑겠다는 거야, 떨어뜨리겠다는 거야.'
시험 응시 기한은 메일을 받는 날로부터 2주였다. 기한 내에 응시하기가 어려울 경우, 최대 6주까지 연장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시간이 넉넉해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하고 3초 만에 깨달았다.
'안내서의 내용이 기한을 연장해야 할 정도로 까다롭단 말이야?'
이번에는 시험을 볼지 말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어 서가 아니다. 오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긴 아깝지. 내가 기필코 합격하고야 말겠어.'
전략이 필요하다. 지난번처럼 무턱대고 들이댔다간 화끈하고 얼얼한 맛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 먼저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해 봤다.
첫째, 프로젝트 안내서는 정확히 178페이지가 늘었다. 시험 응시 기한은 앞으로 2주. L사의 두 배다. 시간상으로는 오히려 A사가 더 여유 있는 셈이다.
둘째, 이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격시험에 통과하는 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거다. 물론 그들에게도 쉬운 과정은 아니었겠지만.
셋째, L사의 테스트가 내게는 일종의 모의고사 였다. 시험 내용은 달라도 업무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는 이미 경험했다. 낯선 일을 대하는 긴장감이 줄었다. 해볼 만하다.
그렇다면 필승 전략은? 서두르지 않기.
시간에 쫓겨 업무 지침서를 읽다 보니, 적당히 이해했다 싶으면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었다. 이게 문제였을 거다.
'적당히'는 '대충'과 다름없다. 알아야 할 건 제대로 알고 넘어가야 실전에서 헤매지 않는다.
학습할 시간이 모자라면 시험 날짜도 미뤄주겠다는데, 기회를 잘 활용해야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프로젝트 관리자는 되도록 많은 지원자를 합격시키려고 나름의 대안을 궁리해 낸 것 같다.
프로젝트 안내서는 업무를 처리하려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만 담고 있다. 설명이 세심해질수록 업무 오류는 줄어들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 지침을 기꺼이 감내하기로 마음먹은 지원자를 위해 관리자는 '시간'이라는 보너스를 주기로 한 게 아닐까.
'문서 389장'의 관문을 뚫었다. 시험 보는 날짜를 2주나 더 연장해야 했지만 어쨌든 넘어왔으니 됐다.
이제 다음 관문으로 간다.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가장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할 단계다.
그리고 나는,
성공했다.
온라인 테스트에 최종 합격했다.
7
A사는 합격의 기쁨을 누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채용 담당자는 "축하합니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라는 축하 인사와 더불어 '프리랜서 고용 계약서' 한 부를 보내왔다.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한 후, 계약 사항에 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해달라고 했다.
계약서는 총 7장이었다. 작은 글씨로 촘촘하게 쓰인 탓에 전부 읽는데 이틀이나 걸렸다. 조항은 여러 가지로 복잡했지만, 내용을 간추리면 이랬다.
'본 계약은 6개월간 유효하며, 서명하는 즉시 체결된다.
계약 기간은 물론 계약 종료 후에도 동종 업계로의 취업을 금지한다(동종 업계로 분류되는 회사 목록에 L사가 있었다).
A사에서 공유된 모든 문서와 자료, 업무 내용은 전부 기밀이다. 외부에 공개돼서는 안 되며, 특히 타 회사로의 유출을 엄격하게 금한다.
만약 단 하나라도 계약 조항을 위반했을 경우, 계약은 즉각 철회되며 회사는 법적 대응에 들어갈 것이다.'
이건 고용 계약서라기보다 '정보 유출 금지 서약'에 가깝지 않나?
합격 축하 인사가 무색할 만큼 계약 조항은 무시무시했다.
'뭐만 하면 소송을 걸겠대.'
역시 '소송의 나라'다운 대처다.
정신 바짝 차리고 계약 내용을 숙지해야 한다. 미국에서 보내온 소장을 받지 않으려면.
동종 업계로 이직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A사와의 계약이 만료되면 업무 시스템이 비슷한 다른 회사, 즉 A사에게는 경쟁사인 곳에 지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야심 찬 계획은 야심에서 멈춰야 했다.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쩌겠나.
회사가 '갑'이고, 내가 '을'인데.
여기까지 온 게 있는데.
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계약 사항에 모두 동의함' 옵션을 선택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제출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이 나왔다.
곧장 프로젝트 관리자에게서 메일이 왔다. "Y 프로젝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는 제목을 달고.
그때야 비로소 실감났다. 내가 A사와 일하게 되었다는 게.
'그렇게 나를 시험했지만, 봐봐, 결국은 내가 해냈지?'
생각이 현실이 되었다.
운명이니 뭐니 설레발쳤던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서 어찌나 다행인지.
운명이 이끄는 대로 A 성벽 앞까지 왔다. 운명은 말했다.
"이제부터는 네 몫이야. 겹겹이 닫혀있는 저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갈지, 그냥 포기하고 되돌아갈지는 네가 선택해. 내가 할 일은 여기서 끝났어."
내가 대답했다.
"아니, 이건 함정이야. 내가 저 문을 모두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가 운명이지. 내게는 포기도, 다른 선택지도 없어."
운명은 주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내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