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고 싶었던 내가, 먼저 이해하려 애썼던 기록
"왜?"
"이게 이걸 의미하는 거야?"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나는 왜 질문이 많을까? 이것도 또 질문인 건가?
자주 찾는 경기도 부근의 한 카페에서 소화가 잘된다는매실차 하나와 반도 못 먹지만 나름 오래 있겠다는 의지로 말렌카 하나를 주문했다. (말렌카는 꼭 호두 말렌카를 주문한다.)
사주상으로 나는 올해가 삼재라고 한다. 그 단어를 의인화하는 건 ‘나'인건가? 사주를 믿지 않는 나를 믿게 만들 정도로 최근엔 유독 내겐 기억할 만한, 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중심엔 나의 '성격'과 '질문방식'이 있었다
나는 집요한 사람이다. 집요함은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이든, 사랑이든, 관계든 내가 진심으로 알고 싶고 얻고 싶은 게 있다면, 거기엔 어김없이 질문이 따라붙는다.
학창 시절,
질문은 유익한 도구였다. 질문 덕에 선생님의 주목을 받았고, 원리를 이해한 덕에 좋은 성적도 따라왔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을 향한 질문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관계에서는 오해와 부담, 때로는 불편함을 유발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회사에서의 '왜요?'
위계가 견고한 구조 안에서 상사의 결정을 이해하고 싶어 던진 질문은, 때론 ‘이의를 제기한다’는 시그널로 오해되었다. 물론, 내가 '거역해야지'라는 마음을 갖고 행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에너지를 아무 데나 쏟고 싶어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일 자체가 사실 비효율적인 일이기에 저런 생각까지 도달하지도 않지만, 무쌍에 그리 편안하지 않은 인상 덕인지 나의 질문들은 대개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차라리 입꼬리를 올리는 수술이라도 해야 하나, 눈매를 부드럽게 다듬어야 하느냐는 다소 씁쓸한 자조 섞인 생각까지 떠오른다.)
상사의 판단이 내 기준에선 납득되지 않을 때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그들의 경험과 식견을 신뢰하기에 질문을 던진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 거란 믿음에서다. 하지만, 보통의 상사들은 나의 꼬리 질문이 길어질 수록, 반대로 내 꼬리부터 밟기 시작하여 결국 나의 모든 것을 밟아버렸다. 일에 대한 애정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마음은 순식간에 불온한 호기심으로 낙인찍혔고, 내가 던진 물음표들은 칼끝처럼 되돌아왔다.
연인 간에도 갈등은 필연이다.
나에게 있어 관계의 지속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언제나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인가’였다.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무너뜨려선 안 되는 성역처럼 여겨왔다. 그래서 상처받은 마음도, 말끝에 남겨진 서운함도 스스로 삼키고, 묻어두고, 조용히 감내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방식은 초반엔 평화를 유지하는 데 꽤 유용해 보였다. 하지만 감정이란 건, 어둠 속에 오래 두면 조용히 썩거나, 결국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지키고 싶었던 관계를 내가 만든 침묵 속에서 조금씩 잃어갔다.
뼈저리게 이를 체험한 후, 나는 본래의 성향대로 회피가 아닌 돌파를 선택하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다툼의 빈도는 늘었지만, 질문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로였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너가 아니기에 우리는 각자의 관점과 방식으로 세상을 읽는다.’ 그 다름들을 식탁 위에 하나씩 올려두고, 조금씩 맞춰가며 함께 마주하는 일이 당장엔 고단한 여정일지언정 분명 점차 맞춰야 할 것들이 줄어들고, 맞는 것들이 많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함께 겪어온 사이라면, 비슷한 장면이 다시 찾아올 때 상대방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지'
혹자는 '그럴 수 있지'라는 마법의 단어로 상대방의 생활 방식을 이해해야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 그 말은 그저 가볍게 꺼낼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건, 그 순간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마음속에 어떤 감정의 물결이 일고 있었는지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마음의 결을 따라 내려가고, 겹겹이 쌓인 맥락의 먼지를 털어내며, 한 사람의 사유와 감정의 밑바닥까지 손끝으로 짚어보는 작업. 나는 그것을 '질문'이라는 방법으로 해왔다.
“그럴 수 있지”라는 건, 그렇게 수십 번의 물음이 천천히 쌓여 피어나는 것이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쉽게 놓아도 아프지 않은 관계라면, 굳이 애쓰지 않고 감정없는 '그럴 수 있지'하고 내버려둔다. (사실 나는 프로 손절러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묻는 나의 질문은 발전이자 관심이며 , 그 사람과 이어지고자 하는 마음의 실이다.
내게 질문이란, 투박한 원석 속에서 보석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그 마음을 갈고 닦아, 비로소 빛나는 이해로 완성하는 긴 여정이다.
그냥 너의 의도를 이해하고 싶어. 그게 전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