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면 조직의 유연한 진화라 하겠지만, 내 눈엔 조직개판 시즌5.
이곳에 입사한 지 어느덧 5년 차, 또 조직개편이다.
얼마 전 우리 팀은 또 n회 차 조직 개편을 진행했다.
빠르게 굴러가는 업계답게 조직개편도 빨리, 후딱 해치워버리는 게 국룰인건가?
기존에 조직개편은 테트리스하듯 구색 갖추기였다면, 이번 조직개편의 중심엔 '나'가 있었다는 점에서 파격적이기는 했다. 조직개편이 된 이유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소는 (나는 참전 의사 조차 밝히지 않았던) '정치적 싸움'에서 밀려나서다. 정치적 싸움이 타당했다고 포장하기 위해선 마치 전래동화마냥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던 일로 만들기도 하고, 나라는 사람을 일이 아닌 다른 요소로 판단해 평가한다.
00님은 조금 쎈 편이에요.
다른 사람을 험담하는 곳에서는 침묵이 금이지만, 나서야 할 때를 앎에도 유지하는 침묵은 무지다.
거창하게 잔다르크를 표방하며 대의를 찾고자 한 것도 아니며, 단순하게 문제가 있어 보이는 부분들을 지나치지 않고 비단, 그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닌 타인의 문제더라도 남들보다 목소리를 더 많이 냈을 뿐이다.
"팀장님, 00님은 주니어고 00님은 시니어인데, 주니어의 업무가 더 하드하다뇨. 아무리 00님이 데려온 시니어를 편애하시면서 업무 분배에서의 형평성은 부당합니다."
"00님, 00님을 혼내실 때는 자리에서 모욕감을 주기보단 회의실에 따로 불러서 차분하게 말하셨으면 합니다."
"실장님, 이건 00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 책임을 져야 하는 연대책임입니다."
개선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요청하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조직에서는, 그리고 그 조직이 더더욱 친목에 의해 유지되는 관계라면 내가 낸 목소리는 그저 모기 소리처럼 성가신 것에 불과하다.
홀드가 없는 암벽을 올라야 하는 상황 속. 로프라도 공유해줄 사람이 한두명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바뀔 텐데. 바람대로 되지 않고 거센 바람만 불어댈 뿐이니 위태롭게 흔들리는 건 암벽 위의 나였고, 결국 내가 떨어지는 상황이 일어났다.
결국 그렇게 나는 온 몸을 바쳐 일했던 팀으로부터 토사구팽당했다.
나의 상황을 들어줄 사람도 없고, 누군가를 위해 싸웠지만 나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외면한다.
남은 건 무엇일까?
흔한 착각일까, 알면서도 또 걸어보는 기대일까?
내가 곧 회사를 대표했으면 좋겠고, 나의 정체성이 회사가 되길 바랐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니, 그곳에서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욕심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올라가는 방법은 몰랐지만 성취욕, 명예욕도 품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회사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건지, 넥스트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목표치를 정해두곤 했다. 그런데 회사는 30여년을 다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의 집합소다보니 내 멋대로 만들어 나가는 1인칭 시점의 내 꿈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요령없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앞서 말한 현타의 순간들이 찾아오고 심할 경우 번아웃으로 이어진다.
나 역시 여러 사회/회사 생활을 통해 여러 차례 깎이고 깎여 더 이뤄질 침식이 있을까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번 상황은 나를 깊은 번아웃으로 몰아넣었다.
"너는 회사가 아니야. 너는 회사의 일부라는 거야. 그 회사가 무너지면? 그곳에 전부를 건 너 또한 한순간에 무너질 수가 있어. 고로, 너의 자아실현은 회사가 아닌 밖에서 실현할 수 있어야 해. 네가 진짜로 지향하는 모습으로 말이야."
2년 전, 나보다 사회생활을 많이 한 선배가 해준 말이다. 그때의 난, 다른 에세이에 적었기를,
사기가 끝내 꺾이더라도, 사기가 한 줌이라도 남아있는 한 최대한 회사에서의 자아 찾기에 몰두해 보려고 한다고 답했다. 지금에서야 침묵이 답이었을까? 고 요근래 되뇌어보았는데, 팀 내에서 벌어지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거나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사실 뭐 이런 일로 한두번 버려짐 당하나. 어쩌면 그게 회사에서 진정 내가 이루고 싶었던 자아실현이었을 수도 있겠고.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틀 뒤, 나의 롤모델이자 봄날의 햇살인 헤드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만 처리할 것 같았던 그 분께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어린 답변이 돌아왔다.
"합리적이지 않은 곳이 이 업계고, 이쪽 사람들이다. 합리적이지 않은 곳에서 합리성을 찾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사람은 버틸 수 없다. 00님, 외눈박이인 세상에서는 두 개의 눈을 지닌 우리가 외계인이다. 그러니 그 부당함에 정면 돌파가 아닌, 위장을 해서 살아가는 법을 찾는 것이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고 저도 그렇게 맞춰 변화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고,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는 것도 명심해라."
벌써 일한 지 어느덧 9년 차, 또 생각에 잠긴다.
이쯤되면 어렴풋 그려뒀던 자리에 도달했을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손에 쥔 건 확신보다 물음표가 더 많다.
10년 전에도 이런 고민을 했으니, 10년 뒤에도 이 고민은 여전할 거라는 건 국룰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