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은 것도 아니고, 너무 좋다니까요

by 은지금

“퇴사하니까 어때?”


퇴사하면 정말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다. 뭐라고 답하는 게 가장 좋을지 매번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야”는 자신감 없어 보이니 탈락. “뭘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는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니 탈락. “너도 퇴사하면 알게 될 거야”는 불필요하게 의미심장하니 탈락. 심각한 고민 끝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전하면서 간단한 답변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짧고 굵게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것. 밝은 웃음을 곁들인.


혹시 너무 짧고 초라해 보이는가. 더 대단한 얘기가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젓는 당신에게 다시 한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이보다 더 완전한 표현은 없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있다.


직장인에게 퇴사 이후는 미지수의 세계다.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고 멀어져 가는, 어딘가에 있다고 얘긴 들었지만 직접 보진 못한 상상의 동물 비슷한 것이다. 동시에 의외로 가까운 세계이기도 하다. 힘겹게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는 매일 아침마다, 동료들과 불필요한 갈등을 벌일 때마다, 습관적으로 상사의 눈치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마다 퇴사 이후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포즈까지 더해주면, 긍정적 효과가 두 배!

“너무 좋아”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진실과 맞닿아있는 답변이다. 어쩌면 상대가 가장 듣고 싶어 했을 답변이다. 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짚어주는 친절한 답변이기도 하다. “사실 나도 그 세계로 가고 싶어”라는 말을 억지로 삼키는 위기의 현실 직장인을 상상해 보라. 그들에게 너무 현실적인 답변을 할 이유는 없다. 그런 답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가 나를 거짓말쟁이 취급을 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보는 일은 없을 거다. 수차례 실행해 본 결과니 믿어도 좋다.


다만 이보다 강한 표현을 쓰는 건 주의해야 한다. 잘못하면 아직 퇴사의 단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붕 떠 있는 풍선 퇴사자1이 될 수 있다. 옛 어른들이 과유불급을 강조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게 수치스러운 취급을 바엔 차라리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는 평을 듣는 게 낫다.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전국에 펴져있는 모든 퇴사자가 동의할 것이다. 완벽하거나 좋은 답변이 아닌 완전한 답변이라고 표현한 대목을 다시 주목해 달라.

회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의 모습, 너의 모습, 우리의 모습. 부인하는 상대에게 거울을 보라고 말해주자.

한 가지 장점이 더 있다. “너무 좋다”는 발음을 하는 즉시 정말로 내 삶이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플라세보 효과 체험이다. 살면서 ‘좋다’에 ‘너무’를 붙이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방금 8초 정도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무언가에 대해 ‘좋다’고 표현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거기에 ‘너무’까지 붙이는 건 퇴사 전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입에서 내뱉어본 적 없는 조합이라 처음 말할 땐 어색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지금 글을 쓰면서도 자연스럽고 푸근한 미소가 걸린다. 내가 지금 ‘너무’ 좋다니. 너무 좋은 사람이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라니. 세상 사람들, 제가 지금 너무 좋아요. 그냥도 아니고 너무 좋다니까요. 이번엔 진짜라구요.


“요즘 어떻게 지내”에 대한 내 인생 올타임 답변 1위는 “그냥 그래”였다. 내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한국 현대인의 본분을 지키면서 내 안에 숨어있어 잘 보이지 않는 진심을 전하려 애쓴 결과물이다. 초기엔 어떤 답을 할지 잠시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지만, 나중엔 기계처럼 무호흡으로 말해버린 적도 많다. “맨날 똑같지 뭐” 같은 흐리멍덩한 대답이 높은 확률로 2위 정도 차지할 거다. 제가 그냥 그렇게, 매일 살고 있습니다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 참 다행이로군요. 전 지금 너무 좋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