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이제 회사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걸요

by 은지금

정확히 3주. 퇴사 후 현실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숨죽여 살고 있던 ‘내 안의 나’는 퇴사라는 채찍을 맞고 원하든, 원치 않든 깨어난다. 마치 어두운 땅속 새싹이 따스한 봄날 햇살을 받아 세상 밖으로 움트는 것처럼, 굳었던 근육이 필라테스 선생님의 불호령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잠잠하던 도파민이 아무 생각 없이 켠 릴스와 쇼츠에 쭉쭉 뽑아지는 것처럼 되살아나 소리친다. 여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냉동 인간으로 잠든 캡틴 아메리카는 70년 만에 뉴욕 한복판에서 깨어나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생각보다 너무 많이 발전한 세상을 두리번거린다. 회사에 다니며 강제로 잠들어버린 내 안의 나는 고작 10년 만에 깨어나 눈을 휘둥그레 뜨고 너무 망해버려 폐허가 된 내 안의 세상을 두리번거린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10년 간의 회사 강점기가 우리 애를 얼마나 망쳐놓은 거야. 세상에 재밌고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만성 피로와 불안, 우울은 기본이고, 좋은 걸 봐도 좋은 줄 모르며 멍 때리고 살았다니. 아이고, 억울해라. 의사 양반, 10년을 길바닥에 내다 버린 우리 애 어떡해요.


냉동 인간에서 깨어나자마자 휴가도 없이 싸워야 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는 어떤 기분이었까. 영화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스틸컷.


슬픈 일이다. 어떻게 지내는지 물으면 “그냥 그래요”라고 답한 날들이 너무 많이 흘러가 버렸다. 3년 5개월 전 수요일 오후에 뭘 했는지 떠올려 봐도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일하고 있었을 것) 1년이 365일이니까, 10년이면 3650일 정도. 맨날 똑같고 존재감 없는 날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3650일이 불쑥 나타나 한 자리에 모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를 꾸짖는 청문회를 상상해 봤다. 너무 무섭다. 물론 나도 할 말은 있다. 아니, 선생님들, 제가요.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저도 잃어버린 제 3650일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는지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없다면 일단 알겠습니다.


XL.jpg 저도 지하철과 버스가 너무 무섭습니다. 충분한 퇴사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도서 '지하철이 무섭다고 퇴사할 순 없잖아' 표지


불행으로 가득한 지난 과거를 긍정 회로에 넣고 잘 돌리면, 그나마 다행인 사실도 몇 가지 나온다. 먼저 긴 시간 동안 외면받았던 나를 이제야 꺼내어 되찾았다는 것이다. “뼈를 내주고 살을 얻는 것처럼, 시간을 내주고 나를 얻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네. 조금도 수긍할 수 없는 말이군요.” 내 시간을 일부 떼어주고 월급으로 돌려받으려 했을 뿐, ‘나’ 자체를 도매금으로 넘길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이건 불공정하고 부정한 계약이므로 원천 무효로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라도 돌려받아 참 좋고 뜻깊고 감사하지만, ‘나’는 원래 내 거였는데요.


또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지나간 3650일보다 더 많은 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봄날일 수 있었던, 시커먼 잿빛의 날들은 갔다. 너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을 맞이하기 딱 좋은 날씨다. 혹시 지금부터 나를 잘 지키고 정말 정말 좋은 시간을 잘 쌓으면, 잃어버린 과거의 날들조차 의미 있게 다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헛된 기대라고요?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지난 2011년 4월 프랑스로부터 145년 만에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원치 않게 남의 나라에 있었어야 했던 의궤의 삶도 파란만장해 보인다. 출처=노컷뉴스 기사.


돌이켜보면 볼수록 퇴사한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다. 조선이 주권과 함께 뺏긴 외규장각 의궤를 대한민국이 되어 반환받은 감동이 이런 걸까. 강제로 뺏길 땐 그게 중요한 건 줄도 몰랐지만, 돌려받을 때는 새삼 귀중한 선물이 되어버린 너무 좋은 날들. 다짐합니다. 오늘부로 회사 감정기에서 독립한 나.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며 충성하며 살아가겠음을 굳게 맹세합니다. 에이-멘.


가끔 다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 없냐는 말을 듣는다. 이토록 친밀했던 전 직장 동료들에겐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만둔 퇴사자1에게 계속 말도 걸어주고, 밥도 사주고, 아직 같이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살갑게 대해주는 따뜻한 마음.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 고마움에 속아 소중한 지금을 잃지 말자. 어떻게 맞이한 광복인데, 이걸 다시 자발적으로 반납할 수가 있겠는가. 선생님들, 좋은 회사에 앞으로도 열심히 다녀주십시오. 저는 지금도, 앞으로도 진심으로 파이팅 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가끔 제 생각날 때 맛있는 고기라도 사주시면 아주 많이 감사하며 더 열심히 응원할게요.


오늘의 교훈 : 전 직장 동료1이 복직 제안을 하더라도 웃는 얼굴로 소중히 대하는 멋진 퇴사자1이 되자. 1희1비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