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침 출근길마다 생각했다. 이놈의 회사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모든 게 지겨웠다. 사람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날 자유조차 없다니. 지옥 같은 출근길은 또 어떻고. 눈이 오건 비가 오건 몸이 안 좋건 안 좋건 인정머리 없는 이놈의 회사는 개인 사정 따위 알고 싶어 하지 않지. 내가 그만두잖아? 거짓말 아니고 진짜로 누구보다 잘 놀 거다. 이렇게 놀면 그만둘 만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제대로 놀 거야. 거짓말 아니다. 한 번 두고 보자. 내가 어떻게 노는지 보여줄게. 회사만 때려치우면! 이 지긋지긋한 거지 같은 회사만 때려치우면!
시간이 흘러 정말로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노는 게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누구보다 잘 놀고 있는 걸까 돌아봐도, 생각만큼 잘 놀아 재끼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 요란하고 떠들썩하게 놀아줄 거란 과거의 결심이 거짓이었던 걸까. 아니다. 그럼 그때는 진실이었고, 지금은 거짓인 이중적인 내 모습이 퇴사하는 동시에 수면 위로 드러난 걸까. 아니다. 그럼 사실 나에겐 노비처럼 시키는 일을 해내는 재능이 있었을 뿐, 내 맘대로 자유롭게 놀아 재끼는 재능 같은 건 없었던 걸까. 아니다. 모두 틀렸다.
퇴사한 다음 날부터 논다는 개념이 사라졌다. 일하지 않으니, 놀이와 일의 경계선이 흐려진 것이다. 내가 뭘 하든 그건 노는 걸로 호명됐다. 온종일 자도 노는 거였고, 아파서 쉬는 것도 노는 거였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뭔가를 하고 돌아온 날도 노는 날이었다. 더 잘 놀고 못 놀고를 구분하는 선 같은 건 없었다. ‘놀다’의 덩어리가 너무나 거대하게 커져 버렸다. 그 앞에 더 제대로 놀아보겠다는 의지나 오늘의 놀이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결심 같은 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떻게 놀아도 놀아버린 하루하루는 똑같았다. 무력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매일매일 끝없이 찾아오는 노는 날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제대로 놀아보라고 깔아준 판 앞에서 패배하는 건 언제나 나였다. 노는 게 분명 재밌거든? 너무 좋거든? 근데 어제 논 것과 오늘 논 게 다르지 않대. 이렇게 놀아도, 저렇게 놀아도 똑같고 구별하는 의미가 없대. 난 지난주엔 정말 잘 놀았고, 이번 주는 대충 놀았거든? 그래도 다 잘 논 거래. 어떤 날들은 내가 정말 열심히 뭔가 일했거든? 그래도 사람들은 나한테 맨날 노니까 부럽대. 내가 놀아 재낀 에너지와 시간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어떻게 이러지? 세상이 나한테 왜 이래?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사 다닐 때 지옥 같은 월요일 아침 출근길을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리는 것이다. 그럼 지금 주어진 시간과 자유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빠르게 행복해졌다. 놀아도 놀아도 더 놀 수 있다는 건 그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니까. 당신은 지금 이 시각부터 놀면 됩니다. 제한 시간은 없습니다. 대신 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놀기 싫어도 놀고, 재미가 없어도 노세요. 더 이상 못하겠다고요? 그럼 다시 회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노는 것의 기준을 다시 설정해야 했다. 이전엔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는 것이 노는 거였다. 학창 시절엔 학교 숙제를 하지 않는 것, 학원에 가지 않는 것, 시험공부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노는 거였다. 시험 기간에 뭘 해도 재밌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험공부를 하지 않기만 하면 숨만 쉬고 있어도 노는 거였으니까. 회사도 마찬가지다. 회사 일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노는 거였다. 일해야 하니까 놀고 싶고, 놀지 못하니까 일해야 하는 무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 일했다는 걸 그만두고서야 알았다.
회사를 그만두자 해야 하는 일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논다는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새 환경에선 새 규칙이 필요하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부여하는 것. 그 일을 마치고 나서야 놀 시간이 주어진다는 규칙을 마음 한구석에 적어두고 되새겼다. 이제 해야 할 일을 정하는 건 나였다. 그 일을 수행하는 것도, 시간을 어겼을 때 책임을 지는 것도, 노는 시간을 정하는 것도, 노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모두 나였다. 오늘은 이만큼 일하고 놀아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근데 정말 이렇게 해도 될까요? 혹시 문제는 없을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제가 곧 당신이고, 당신이 곧 저니까요. 이제 잘 놀기 위해 일을 시작해 봅시다.
마음의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이제는 내가 지금 잘 놀고 있는지 검증하거나 비교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지시와 회사에서 부여한 업무, 국가가 정한 법정 공휴일, 월화수목금토일 등의 기준에 내 시간과 내 할 일을 맡기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나에게 당근을 먹이고 채찍을 쥐여주는 방법을 알게 됐다. 매일매일 노는 것에 감사하게 됐다. 일하는 나와 노는 내가 서로 손을 잡고 서로에게 힘을 주며 응원하게 됐다. 오늘도 시간을 보낼 해야 할 일과 노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이렇게 할 일을 열심히 해주시는데 제가 감사드리죠. 그럼 이번 일만 마치고 제대로 한 번 놀아보시죠. 네, 노는 건 자신 있습니다! 세상에서 노는 게 제일 좋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