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할 일은 제가 결정하는 스스로 어른이랍니다

by 은지금

“그래서 회사 그만두고 뭐 하려고?”


정말 많이 들었다. 퇴사 후 가장 많이 들은 질문 자체 선정 베스트 3에 포함되고도 남는다. 상대방의 눈이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치 이 질문의 답에 따라 이날 만남의 의미가 결정된다는 듯, 묵직한 정중함 뒤에 집요함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 옆 테이블마저 내 입에 집중하는 듯 주변 공기가 고요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저도 여러분이 만족스러워하실 만한 답변을 드리고 싶거든요. 어떻게 이걸로는 부족하실까요. 혹시 이건 어떠세요. 이거도 아니면, 혹시 원하는 답변 어디까지 생각하고 오셨어요?


앞으로 뭐 할 건지 묻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서로 예측 가능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한 명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로 넘어간다는 것. 아주 잘 알던 사람이 한순간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상황, 낯선 거리감을 반기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어쩌면 상대의 앞길을 더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무슨 일을 할지는 알아야 뭐라고 말을 덧붙일 것 아닌가. 선수끼리 다 알면서 왜 이러실까. 자, 이제 우리 툭 터놓고 시원하게 얘기해 볼까요. 그래서 앞으로 뭐 하시려고?



내 답변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 넓은 세상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회사에 다니며 같은 일을 했다는 것. 그 기적 같은 우연에 아무 의미가 없을 리 없다. 내가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는 이유가 있듯, 그에게도 다른 길을 가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미래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를 그 길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상대에겐 답을 망설이는 내 모습이 자신의 천기를 누설할지 말지 고민하는 신의 대리인처럼 보였을까.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알려주소서.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일이라고 해주세요.


안타깝게도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답변은 할 수 없었다. 퇴사 결심에 모든 공력을 쏟아서일까. 정확히 뭘 해야겠다고 결심한 다음 퇴사한 게 아니었다. 그만두는 결정엔 아주 단단한 확신이 있었지만, 다음 일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나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무슨 일을 할지 제일 궁금한 건 나였으니까. 적어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는 정도가 말해줄 수 있는 정보의 최대치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좀 괜찮아지면 다시 돌아오라고요? (누가 괜찮아진다는 거지? 회사? 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제가요,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곳에 제 발로 다시 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저 대신 여러분이 훌륭한 회사로 만들어주십시오.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입니다.


선을 넘는 오지라퍼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의 문장


돌아보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들어버린 질문이다. 그만둘 당시의 내 상황이 그렇게 미리 플랜을 짜뒀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하는 마음이 조금 아팠다. 나의 계획 없는 퇴사를 알게 된 일부 동료들은 나에 대한 걱정에 걱정에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계획 없이 회사를 그만두면 불경기에 엄혹한 세상의 찬 바람을 맞으며 이직도 할 수 없게 되고 더 암울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듯이. 잘못하면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 인생의 리즈 시절처럼 남을 거라는 듯이. 계획 없는 퇴사가 독이 된 수많은 사례에 내가 포함될 거라는 듯이.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말들을 듣고 있었던 그 장면들이 잘 잊히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자신의 선택 역시 존중받고 싶었던 걸까.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옮길 곳이나 확실한 계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100% 옳은 말은 아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회사마다, 팀마다 그때그때 사정은 모두 다르다. 이론적인 일반론에 현실 속 사람을 욱여넣는 것이 당사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만둔 회사가 아니라 회사를 그만둔 나이지 않을까. 국가의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내 삶을 결정하는 힘은 나에게서 나오기 때문. 내 눈앞에서 나를 걱정하는 타인들은 나를 결정하거나 책임져주지 못한다. 그러니까요, 이제부턴 제가 한번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제 인생을 책임져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제 할 일 정돈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어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