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선배님들, 그래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by 은지금

나의 퇴사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누군가는 물었다. 무슨 일 있냐고, 누구 때문이냐고, 어떻게 하면 퇴사하지 않겠냐고. 만약 퇴사 기념 인터뷰에서 “그래서 당신이 퇴사를 결심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답할까. 몇몇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 커리어를, 나를 망친 사람들. 마지막 순간이 되자, 그들에 대한 원망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그들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보고 있나, 당신들. 난 죽지 않고 잘살고 있다. 그것도 너무너무.


대신 평생 몰랐으면 좋았을 그 몇몇을 앞으로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큰 위안을 줬다. 다시는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감정을 억지로 받아내지 않아도 된다. 이해 못 할 언어를 여러 번 곱씹으며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존재를 납득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 내 운명을 탓하고 억지로 수긍하지 않아도 된다. 밖에서 만났으면 아무 인연도 아니었을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내 삶에 불필요하게 큰 지분을 차지했다. 이젠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함께해서 더러웠고, 앞으론 다신 만나지 맙시다. 혹 길 가다 마주쳐도 아는 척 하지 마쇼.


함께해서 좋지 않았으면 서로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퇴사 과정에서 가장 많이 떠오른 건 선배들 얼굴이었다. 한발 먼저 회사를 나간 퇴사 선배들. 그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나와 같은 결심을 했겠지. 회사에 있을 땐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수년 전의 그들이 갔던 길을 이제야 걷는 기분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지만, 닿을 수는 없는 공백을 천천히 메워갔다. 적어도 이젠 뒷모습이 아닌 정면을 마주할 자격을 갖춘 것 같았다. 너무 늦었지만, 꼭 늦은 건 아닌 것 같았다. 퇴사 선배님들, 그래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이제야 알았습니다. 너무 늦었지요. 그래도 좋은 날 술 한번 사주십시오.


오랜 시간 같은 길을 걷던 동료들은 나와 길이 엇갈렸다. 내 결정으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지게 된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같은 생각과 같은 입장에 섰고, 서로가 전하는 말과 고민과 결정들은 우리에게 중요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한순간 타인의 이야기가 됐다. 싫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서로가 노력하고 만나고 대화를 나눠도 다름을 극복하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 내 손을 밧줄로 묶고 총을 들이밀며 퇴사해서 나쁜 점 5가지를 말하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를 이야기다. 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 아닐 테니 손은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


저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거든요. 혹시 아는 분 있으면 저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잘 알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어 보이는 마법을 반복해서 목격해야 했다. 그러자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불안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내 행복을 위해 퇴사했는데 왜 불행해지는 기분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혹시 나인 건가. 혹시 지금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 완전히 맞다고 생각한 결정이 큰 실수였던 건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왜 인생엔 리셋 버튼, Ctrl+Z 버튼이 없는 거죠.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죠. 거기, 사람 없어요? 누가 대답 좀 해주세요.


시간은 많은 걸 해결해 준다. 인생 선배님들의 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단절을 의미하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고 방향이 달라졌다. 그래도 함께 걸어가는 건 가능하다. 이 모든 게 내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임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나의 세계를 움직이는 자전축은 회사에서 나 자신으로 바뀌었다. 지금부터 이 세계의 규칙은 제가 정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주세요. 그렇다고 전부 다 나가진 마시고요.


동료는 언제 어디서나 소중한 존재다. 회사에서든, 회사 밖에서든, 바다에서든.


전 직장 동료 중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을 모른다. 당연하게도 모르는 사람에게,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 직장인에게 퇴사를 권할 생각은 없다. 혹시 관성적으로 직장을 다니며 고통스러워하고 있거나, 회사 밖 세상이 어떨지 너무나도 궁금하거나, 퇴사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후회할 것 같아 걱정이 크다면, 이 글을 읽는 순간이 잠시나마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당신이 누구든,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을 겪었든,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든 당신을 응원한다. 아무리 회사에 계속 다닐 생각이고 지금 만족하고 있어도, 잠시 퇴사 상상 정도는 괜찮잖아. 상상도 못 하는 건 좀 심하잖아. 거, 너무 야박한 거 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