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에게 루이스가>, C.S. 루이스, 비아토르&알맹4U
지금 교회에 부임하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순간을 뽑자면 권사님들의 장례식 농담이다.
"너 내 부의금 얼마 할 거야?"
"삼 만원."
"에라이! 너 오지 마!"
죽음을 지척이라 생각하는 어르신들의 대화는 거침이 없다. 이전에 죽음을 단순히 먼 일로 생각하거나 두렵게 여기는 게 보통이었다면, 나 또한 아파지고 어른들과 교회 생활을 하면서 '오늘내일하는' 생과 죽음의 한끗 차이를 좀 알 것도 같다.
예전에 팔순으로 예상되는(?) 어르신 댁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다세대 주택 현관에는 아주 큰 크리스마스 리스가 달려 있었고, 어르신 댁 벽지는 온통 보랏빛 꽃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팔순 노인은 자신의 생전 아버지 사진(영정 사진으로 예상됨)을 보여주며 '우리 아빠'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빠의 올곧던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자신의 대학시절, 회사 생활 중 출장을 갔던 일(순간 장소가 어딘지 생각나지 않는 중..) 등을 아주 생생하게 이야기해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스톡홀름!으로 출장 간 게 1960년대 즘으로 예상되는 시절이니 그 시대 그 시절의 신여성으로서 자랑하실 만도 하다. 이전에도, 오늘날도 아름다운 그분은 오늘과 죽음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신여성이자 신할머니 같았다.
며칠 전에는 혼자 사시는 60대 중반의 어르신 댁에 갔다. 함께 간 어르신 두 분은 이미 70대 후반이셨다. 나도 바닥에 앉으면 허리가 아픈데, 어르신들은 그럼에도 외따로 의자에 앉길 거부하고 함께 바닥에 앉으셨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주다가도 여전히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제일 언니가 평소 '사진 없애는 법'을 전수해주고 계셨는데, 동생들도 실천하기 시작한 거다. 방법은 이거다. 앨범 속 사진을 큰 들통에 낱장으로 넣는다. 이때 주의할 점은 두 장이 마주 포개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후에 물 섞은 락스를 가득 넣었을 때 사진 속 '우리'가 완전히 지워지기 때문이다. 어르신 세 분은 락스 물 입혀 사진 속 자신을 없애고 버리는 방법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면서, 결국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이별법을 이야기하신 거다. 80년대 생인 나로서는 "뭘 그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내가'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로 남지 않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어르신들의 죽음을 향한 진지하면서도 농후한 농담 속에 있다 오면 왠지 그들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귀하다.'
<메리에게 루이스가>는 영국의 작가이자 기독교 변증가인 루이스가 60대 중반에 숨을 거둘 때까지 미국에 사는 메리라는 여성과 14년간 주고받은 서신 모음이다. 편지를 읽다 보면 오늘날의 5,60대와는 사뭇 다른 세대 같다. 현대의 좋은 장치나 도구가 없던 시절의 그들은 지금의 7,80대가 사는 모습과 흡사한 듯하다. 둘은 서로의 고통과 슬픔, 분노, 상처 등 정신을 쇠약하게 하는 수많은 오해와 감정을 거둬내는 방법을 나눈다. 그리고 모든 편지에서 서로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다. 편지 초반에, 루이스가 우리가 하는 기도는 실은 우리를 통한 신의 기도라며(롬8:26,27) 모든 일을 하시는 무한한 하나님을 언급할 때, 이전에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으려나, 아침은 왜 또 오나’하는 생각을 왕왕했던 내게 <오늘 신 안에서 호흡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특별히 메리 이모님이 처한 상황이나 그에 대한 반응은 내 모습과 비슷했다(추측이지만). 잦은 병치레와 타인에 대한 민감성 덕분에 관계에 취약한 부분, 그럼에도 소중한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을 지원받는 일, 그에 따른 부담감, 일터에서 오는 막막함 등이 비슷했다. 그에 대한 루이스의 간단명료하면서도 자유로운 권면들은 그 즉시마다 사이다 한 잔씩 시원하게 들이켠 느낌을 줬다. 영국의 아재와 미국 이모님의 인생 고비 배틀 덕분에 나는 아주 큰 위로를 받았다. 게다가 내가 그토록 염원하고 바라는 영국 북아일랜드로 솔찬히 휴가를 떠나는 루이스의 소회는 기가 막혔다! 나는 책을 덮을 때까지 에든버러의 어느 절벽과 더니골의 광활한 바다 앞에 몇 번을 다녀왔다. 인터넷을 검색하며.
루이스의 모든 순간 깨어 있는 통찰이 좋다. 신앙 안에서 자유로운 사고과 일상과 신앙과 학문과 문학의 연결이 가히 부럽다. 암 투병 중인 조이와 결혼을 결심하고 소식을 알릴 때 루이스가 꾹꾹 눌러썼을 글자들에 경이로움을 느꼈고, 조이가 죽었다는 짧은 편지에서 잠시 읽기를 멈추기도 했다. 루이스는 부인의 죽음 이후 급격히 몸에 찾아온 고통들도 씩씩하게 위트로 넘기며 일과 편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는데, 또한, 역시, 아픈 메리에게 늘 희망을 안겨주는 츤데레적 위로법은 그가 얼마나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지점인 것 같다.
루이스는 편지들에서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방식을 언급한다. 하나는 갈망하는 것, 또 하나는 두려워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무시하는 것. 루이스는 사람들 대부분 마지막 생각을 건강하다 여기지만 그것이 가장 불안정하고 위험한 태도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목숨과 정신이 위태로워진 메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자신을 땅속에서 인내하며 기다리고 있는 씨앗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정원사가 정한 때에 꽃으로 피어나기를, 진짜 세상 속으로 올라가기를, 진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씨앗 말이에요. 돌이켜 보면, 이 현세의 삶은 비몽사몽 간의 나른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꿈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새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순간보다 지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199p.
그는 언제나 메리에게 현세의 삶에 충실하길, 희망을 가지길 권면하면서도, 기저에 죽음 이후 본격적인 천국의 삶이 있을 것이란 확신을 멈추지 않는다. 루이스는 내게 오늘도, 죽음도 긍정할 수 있게 해줬다. 마지막 편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아쉬워서 또 읽는 밤이다.
안녕, 루이스! 안녕, 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