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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Apr 12. 2022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나는 휴먼, 주디스 휴먼, 사계절



나는 잘 속는다.

경추베개만 5개 넘게 구매한 적이 있다. 통증을 개선해줄 뿐 아니라 거북목을 교정해준다는 경추베개들. 물론 정착한 베개는 딱 하나다. 거기에 사은품으로 준 지압용 보조기구는 무용지물이다. 보조기구가 경추를 받쳐 목의 피로를 풀어준다는데, 나는 뒤짱구라 뒷머리가 너무도 닿아 목에 부담이 가중될 뿐이다. 뒤짱구가 과연 나뿐만이 아닌지 중고장터에서 이 보조기구는 지금도 활발히 팔리고 있다.





한때는 건강보조식품 마니아였다. 몸이 아파 집에서 요양하며 가장 많이 한 행위는 건강보조식품 검색이었는데, 당시 내 귀는 매일 아침, 건강 프로에 팔랑댔다. 노니가 염증에 좋아요, 아니요, 양배추랑 비트가 더 좋아요, 못 자면 타트체리는 어때요. 대세는 초유 단백질입니다. 이상 내가 구매한 식품들이다. 그래서 몸이 나았냐고? 그저 프로그램마다 매일매일 다른 상품을 소개하느라 용쓴다는 생각밖에….





나는 어느새 세상을 '아픈 사람'의 시선에서 보고 있다. 몸이 아픈 사람에겐 때로 천장까지 닿는 카페 문이 자력으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대중교통은 자율신경계를 교란시키는 롤러코스터다. 덕분에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에 소심해져, 사람들의 말 한 마디가 날렵한 화살촉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럴 땐 눈을 질끈 감고 다른 생각을 하면 좋다. 아픈 이후, 나는 왁자지껄한 무리 속에서 줄곧 혼자였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뿐이었다. 233p.

<나는 휴먼> (주디스 휴먼, 사계절 출판사)





1970년대부터 미국 장애인 시민권을 위해 싸운 주디스 휴먼의 말이다. 장애인을 위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는 그저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외쳤다. 비장애인이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서 제외된 목소리가 실현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가리려는’ 세상에 참 많이도 속았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당신은 꿈꿀 수 있어요.





선거 포스터나 회사 공채 모집 포스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 문장은, 뒤에 괄호 열고 ‘당신에게 장애가 없다면 가능하지요’가 빠진 게 아닌가. 세상은 삶에 대해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그 가능성의 문턱에조차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유연하던 내 몸이 순간 길을 잘못 든, 게다가 고장까지 나고 연료가 다한 자동차가 될 줄 누가 알았나. 친정 엄마는 어느 날 쓰러진 후 몸의 반쪽 신경이 무디다. 장애는 결국 특정한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상태일 뿐 아니라 인간의 노화 내지는 불시의 사고로 인해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일상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장애인과 구분된 일상이 너무나 익숙하다. 책을 덮고, 어릴 적 집 앞에서 본 장애인 학대 장면이 떠올랐고 그 길을 그냥 지났던, 무지했던 어린 내가 오늘에서야 슬프다.





언젠가 휠체어를 타신 성도님이 내게 "사모님이시죠? 교회 홈페이지에서 봤어요." 하고 환하게 웃으신 적이 있다. 실은 나는 그분을 뵌 적이 없었다. 휠체어를 타고는 교회 2층 본당에 올 수 없었으니까. 그분은 교회 바로 앞에 살면서 온라인 예배만 드려야 했다. (이후 건물 노후 문제로 엘리베이터 설치가 불발됐다.) 그분의 사정을 듣고 나니 부끄러웠고, 지금도 때로 그분에게 무용할 내 이상과 고민이 답답하기만 하다.





나처럼 아무도 남의 이야기는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에, 남의 사정을 상상하고 개선해주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주변에 참 많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여전히 속인다. 우리는 함께 할 수 있다고. '우리'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건 속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안다. 이런 불편한 진실과 상관없이 세상은 계속 잘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몹시 똑똑해지니까.





남들이 속이는 대로 살고 싶진 않다. 약자를 배려하면 발생하는 비용이 문제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에게 맞장구치고 싶지는 않다. 교회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인생은 언제나 아름다울 때만 가치 있다고, 그러니 최대한  인생을 가꾸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 대신 자신을 가꿀 시간을 쪼개 예민하게 귀를 열어 보라고. 일부러 고개 돌려 보지 않으면 좀처럼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정들이 있다고. 그런데 이것은 진실로 실재하는 세계라고. 나처럼 자꾸 세상에 속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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