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대학 시절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그 친구는 문창과인 나의 글을 읽어주려 노력하던 고마운 친구 중 하나다. 그때 우리는 지하철 역 아래를 여럿이 걷고 있었다. 누구누구는 팔짱을 끼고 누구는 휴대폰을 보며. 그냥 그렇게 걷다가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가 들은 말인데, 어쩌면 자연스런 기회를 타 참고 참다가 뱉었을지도 모를 말이다. 덕분에 살면서 종종 내가 말할 때 상대가 미간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웃하면 곧 알아챈다. '지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때로 다시 설명해달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응? 다시! 나 이해 못 했어." 이 말은 분명히 나를 잘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아, 그게 뭐냐면, 그러니까" 하며 구구절절 봇짐 풀듯 설명한다. 설명하면서, 친구들을 만나 젤리처럼 몰랑몰랑했던 마음이 조금 긴장해 굳는다. 방정맞게 웃으면서 잔망스럽게 대꾸하면서 실은 나와 그들 사이의 틈을 느낀다. 그리고 실제로 내 말에 자신이 없다.
사모로 지내다 보면, 혹은 주일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대하다 보면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되새김질해야 할 때가 많다. 대놓고 다시 말해달라기엔 무례할 것 같아 '선 끄덕, 후 고민'을 시작한다. 분명 이 학생에겐 이러저러한 배경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이 성도님에게는 일전에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와 같은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 요목조목 따져가며 묻지는 못해도, "아, 이래서 그런거구나?" 하며 마치 선장이 암초와 풍랑에도 방향을 알고 흔들림 없이 해항하듯, 대화의 갈 바, 중심은 놓지 않으려 한다. 물론 이럴 때 오해가 쌓일 수 있고 점검하지 않아 해갈되지 못한 편견이 남을 수도 있다. 대신 다시 질문해도, 그래서 대답을 들어도, 알 수 없을 그들의 세계를 일단 안기로 택한다. 중요한 건 ‘받아들여지는 마음’일 테니까.
사람 사이에도 글처럼 행간이 있다고 믿는다.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볕에 앉아 윗머리가 따뜻하네, 그러나 곧 뜨거워질 거란 건 모두가 알 듯이. 여한 없이 사랑하고 즐거운 중의 사람에게 기꺼이 내야 할, 때로 호사스런 반응이 있고, 구부러진 마음에 부드럽게 침묵하거나 위트 있는 위로로 힘을 실어야 할 때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선 논리의 전개가 항상 곧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냥 같이 왜인지 모르게 붕 떠도, 침잠해도 좋다. 오직 이해를 위해서라면 묻지 않은 게 나을 수도 있다. 이해 없이 정답 없이 아름다운 행간이 유지되어야 하는 때도 있는 거니까. 이해가 안 되어도 우린 사랑하기로 택하니까.
혼자라도 이런 마음으로 놀다 보면은, 작은 틈을 분명 느꼈지만 이내 고맙고, 그냥 좋고, 앞사람이 웃기다. 분명 사람들도 집에 돌아가면, 아니 돌아가기도 채 전에 버스 안에서 혹은 지하철 안에서 혼자가 되어 틈을 충분히 느낄 것이라 짐작하면서. 각자 다른 결은 어떻게든 틈을 만드니까. 아까의 새초롬한 마음과 상대를 이해시키지 못한 살짝 열등했던 자신을 잊는다. 다음엔 한번 "몰라도 돼. 그냥 혼잣말이야"라고 말해야지, 하고 쫄보처럼 다짐도 해보고. (물론 여태 실천한 적은 없다.)
산문인데, 아름다운 시어들과 이미지가 가득해 시작부터 단 몇 줄만으로 나를 흔든 책이 있다. 사람들은 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왜 나만 이렇게 오징어 같을까(오징어 미안해), 문학의 서정을 사람들은 왜 무시할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왜 모두 설명하려 할까 싶은 내면의 질문들에 한정원 작가는 모두 대답해줬다. 가끔은 내가 질문한 것보다 훨씬 더 아프게 나를 이전의 세계로 밀어넣었다. 그랬지. 나는 한때 무대 위에서 시를 읊던 문창과 학생이었지. 그때의 내가 손을 흔들며 말한다.
나는 아직 여기 있다고, 잘 지냈느냐고.
틈을 느끼고 괴로운 건 너만의 일이 아닐 거라고.
그러니 네 마음, 새초롬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물한 살의 내가 웃으며, 돼지코도 하며 장난질을 친다.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인지 영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
125p, <시와 산책, 한정원, 시간의 흐름>, [말들의 흐름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