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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근데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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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Jan 05. 2022

머물 곳은 말이 아니라 사람


*이 글은 장보영 작가의 아래 글에 대한 답장입니다.



https://brunch.co.kr/@bo0/148





오늘도 운전대를 잡았을 언니에게.


언니, 축하해! 정말이지, 내 인생에 수학의 정석만큼 드높은 장벽처럼 느껴지는 운전면허를 따다니! 내가 요즘 일드를 많이 봐서, 나름 완곡한 감탄사가 계속 입가에 맴도는데... 잠깐 해도 될까? "에에에- 스고이, 스바라시!" 만약 언니가 지난 한 해 종종 불안한 자신에게 실망했다면, 왕왕 언니를 닮은 새봄이가 걱정되었다면 "젠젠 다이조부요." 전혀 괜찮지 않겠어? 이 정도 배포라면 말이야. 만약 지금 내가  <2021 가장 용감했던 사람에게 주는 상>을 한 명에게 줄 수 있다면 언니밖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고! 내 주변에는 특별히 운전 앞에서 겁쟁이가 많거든. 번쩍번쩍 금박 상패는 언니의 것이야. 나라면 스스로 너무 뿌듯해서 너른 귤밭으로 달려가 손수 딴 귤을 일가친척에게 보내며 자랑하고 싶을 것... 같아. '내가 운전면허 취득한 기념'이라는 글자를 뽑아 상자 위에 붙이고서 말이야. 물론 빌라와 상가에 둘러싸여 사는 제주도민에게 '신나서 귤밭으로 달려가 귤 따는 삶'은 잦지 않으려나? 언니가 책 띠지에 썼던 "제주도에서 뭐 하고 살아?"에 대한 답들이 떠오른다. 진짜로, 한라산 아직 안 가본 거지?





무튼, 2021년에 언니는 기질과 성향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는 시간을 보냈고, 자신만 자책할 뿐 자녀는 염려하는 지극히 엄마다운 하루하루를 살았고, 입소문에 점점 늘어가는 수업들을 해내며, 운전면허까지 땄으니 얼마나 뿌듯한 한 해야! 정말 언니, 잘 살아냈다. 자주 만날 수 없지만 멀리서 전해오는 언니 소식은 나를 달뜨게 하곤 해. 심지어 요즘 언니와의 대화는 실로 연결한 종이컵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가까운 기분이야. 엄청 가까워.





사실 그래서. 언니 편지를 오래 기다려야 했던 지난 12월 한 달이 더 길게 느껴진 것 같아. (ㅎㅎㅎㅎ) 그렇다고 오매불망 언니 편지만을 기다리진 않았어! 나도 그간 코로나 때문에 못 만난 사람들을 집에 불러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거든. 특별히 작년 한 해는 나 포함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기뻤다' '행복했다' '즐거웠다' 하는 사람은 없던 거 같아서. 나름 위로의 시간을 보냈어. 다들 지독히도 힘들었고, 대체로 하루하루 사는 의미를 붙잡느라 애썼더라고. 그래도 그중에 출산이라든지, 복직 등 누가 봐도 행복한 시간을 보낸 친구들도 있었는데, 행복한 만큼 짊어져야 하는 짐도 컸더라. 정말 그래. 이제 누구든 마냥 부러울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거 같아. 각자 나름의 고통이 있겠지 싶어서. 나는 언젠가부터 기분이 몹시 좋은 날엔 이 기분이 금방 사라질까 봐 두렵고, 행복한 순간에는 속수무책으로 불행이 엄습할까 두렵거든. 마치 "감기 걸린 적 없다?" 입 밖으로 꺼내면 어른들이 허벅지 때리며 그런 말 말라고 하잖아? 그리고 진짜 신기하게 그 다음주쯤 목이 따가워지는 것처럼. 이랬던 몇 번의 경험을 토대로 좋은 것을 마냥 좋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 같아.





코로나 때문일까, 마스크와 이별도 하기 전에 연애를 포기한 친구도 있고, 환경문제와 호르몬 변화로 난임인 경우가 많아진 건지 친구 대부분 난임센터에 가고, 이런 서로의 울적한 기운이 모여서 그런지 불면증이나 공황장애 환자도 주변에 많고, 회사가 갑분 워라밸을 강조하지만 일은 여전히 많아 친구들은 목덜미를 잡고 출근하고. 다들 힘든 시간을 보냈더라고. 육아의 고됨은 말로 표현조차 못하더라. 그저 함께 책을 읽는 온라인 모임에서, "나만 이렇게 죽을 듯이 힘든 게 아니야? 너네도 요즘 그래?" 하고 묻던 두 아이의 엄마가 생각나. 그때 다들 이미 한 김 빠진 공감의 웃음을 보냈어. 힘들 때 말야. 함께 한 책, 같은 한 문장을 읽는 건 나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아, 언니가 내게 좋은 사람들의 동심원이라고 했는데, 아주 그렇진 않아.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친해지는 경우가 많거든. 물론 내가 그들의 교집합인 건 맞지만, 점점 겹치는 가운데 부분이 커지면서 나중엔 나 빼고 자기들끼리 잘 만나. (ㅎㅎ) 신기한 사람들이야. 얼마 전엔 집에 초등학교 동창과 첫 직장 동료들이 함께 모일 수 있었어. 그리고 지금 한 커플(?) 탄생 예감인데, '아리랑'을 맛깔스럽게 부르는 디자이너 친구와, 그에 못지않게 노래를 잘하는 교회 친구가 만나 '천안 삼거리'를 흥얼거릴 태세야. 나를 통해 이야기 중인데, 나는 중간에서 카톡 캡처본으로 거들 뿐, 서로를 향한 관심이 샘솟는 중이야. 맞아. 언니 말대로, '인프제'인 내 주변엔 '엔프피' 같은 활달한 사람들이 많아. 아, 언니 혹시 인프제, 엔프피 같은 말 안 쓰려나? 언니는 MBTI가 엔프피인 거래. 요즘 사람 친구들이 알려줬어.





근데 언니, 좋은 사람들 틈에서도 일단 혼자인 시간이 있잖아? 아무리 많은 사람이 곁에 있어도 별 수 없는 때랄까. 나는 그때가 재작년과 작년이었던 거 같아. 그냥 지난 시간이 살짝 끔찍...하기도 해. 그렇지만 조금씩, 예를 들면 허리의 움직임이 하루에 약 1미리씩 나아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절망에 빠져 지내진 않아. 2022년이 '힘들지라도' 맷집이 생겨 괜찮고, 올해처럼 회복의 기간이 되면 좋겠다고, 믿고 있어. 가만 생각해보면, 유산했던 재작년이 지금 나에겐 송두리째 기억에서 지워진 기분이기도 해. 대신 2021년 작년 한 해, '기억을 열심히 지우는 시간'을 보냈지. 물론 쉽게 지워지진 않더라. 몸과 마음이 모든 기억을 오롯이 밖으로 드러내는, 규칙 없이 발현되는 증상을 지우는 데는 지우개가 산더미만큼 필요한 것 같아. 아무리 지워도 연필로 꾹 눌러쓴 자국은 남는 것 같고. 너무 지우려 애쓰다 종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건강에 집착할수록 내 몸이 더 아픈 날도 있었어. 그렇게 기억을 지우고, 달래고, 서랍에 접어 넣다 보니 어느새 한 해의 끝에 와 있더라고.






물론 혼자인 기분이었다고 진짜 혼자는 아니었지! 가장 아플 땐, 남편과 친정 엄마가 곧 나 자신이었어. 나 대신 해주는 게 아주 많았거든. 친구들도 많이 찾아와줬지. 역시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 감사 손편지도 제법 많이 쓰며 연말을 보냈어. 그런데, 그러다가, 이번 주는 다시 아주 깊은 고민에 빠진 상태야. 어쩌다 들은 말이 문제였는데. 나는 원래 말이 준비되지 않으면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반대로 준비되지 않은 말 또한 어려워하는 성격이랄까. 여럿이 모이는 자리일수록 더 어려운 것 같아. 근데 언니, 사람들이 우리처럼 전부 말에 대해,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 무게를 싣지 않는 것 정도는 나도 이제 아는데, 앎에도 불구하고 덜커덩,했어. 얼마 전에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모임이 있었어. 나는 사람마다 감사 편지를 써갔는데, 갑자기 지난 시간의 소감을 '말해보자' 하니 나는 그때부터 할 말을 찾느라 애먹었어. 이미 편지에 다 썼는데! 나는 그래서 종종 말을 좀 이상하게 하고, 중간에 혼자 생각하느라 차분하다가, 옆 사람이 우니까 다 같이 울다가, 갑자기 크게 웃기도 하는 코미디 같은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다들 나에게 '미안했다'고 하는 거야. 먼저, 언니가 오해할까 봐 중요한 방점부터 찍고 가자면. 사람들의 요지는, 아프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내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무슨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자신들도 처음 겪는 일이라 어려웠고, 애를 먹었는데, '그래서 미안했다'는 거였어. 다른 말로 바꾸면, "네가 아파서 우리도 속상했어" 일 거야. 나도 알아. 내가 힘들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참 당혹스러웠을 거란 걸. 그런데 나는 방점을 올바르게 찍지 못했어. 내가 사로잡힌 말은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려웠어" 였거든.   






근데 언니.

'네게 다가가지 못해서, 어려워해서 미안했다'라는 말은 말야. 아무리 방점이 뒤에 있어도. 이런 말들은 내게 갑작스러운 소낙비에 가까웠어. 나 하나를 두고 여럿이 모두 입을 모아 '미안하다' 이야길 하니 그 순간 정신이 없어졌어. 일대일로 대화를 했다면 좀 나았을까. 모두가 나에게 '미안했다'라고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머릿속에 데이터가 없었고, 그때 누군가는 나에게 "봐봐, 너 혼자가 아니었어"라며 확인하기도 했는데, 난 대답할 여력이 없었어. 뭔가 벅차가지고. 무엇으로 차오른진 모르겠는데. 지금도 저 상황에 대처할 데이터는 내게 없는 것 같아. 그냥 화이트아웃이랄까. 언니가 운전면허 시험 볼 때마다 경험한 그것이 바로 이런 걸까!





모임 이후로, 나는 그저 지난 시간, 내가 외따로 굴 속에 있던 시기가 더 또렷하게 떠올랐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사람들에게 꽤 불편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단 것을 직면했어. 그날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별개로 말야. 그분들은 충분했어, 그동안 이미 넘치도록 잘해주셨어. 그분들과 상관없이 그동안 나를 보던 다른 사람들의 어색한 눈초리와 행동과 말들이 생각났어. 한마디로 갑분싸 같달까. 좋은 사람들의 동심원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 틈에 있는 갑분싸인 점 하나랄까. 지금도 때로 나에게 말을 잘 잇지 못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각나더라. 내 일상이 어떤지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다들 동공이 흔들리거나 너무 조용해져서 내 이야길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던 것 같고. 실은 아픈 이후로 더욱 멀어진 사람도 있고, 어색해진 관계도 있거든. 잘 봉인해서 착착 쌓아 서랍에 넣어두었던 고통의 시간들이 쏜살처럼 날아와 내 앞에 자리하고, 나를 찌르는데. 지금 이틀째 앓는 중이야.






그러다 남편에게 물었어. 이런 기분은 어떻게 떨쳐해야 하느냐고. 말의 방점은 '미안했다'에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 틈에서 외롭고 무섭던 시절이 속수무책으로 떠오른다고. 내가 남들에게 불편한 존재였던 것 같다고. 그랬더니 남편 얼굴이 갑자기 남이 되는 거야.

"네가 불편한 존재였다는 걸 인정해야지.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존재였어, 인정해."

남편은 의무와 생각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야.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빨리 풀어내고 떨쳐내는 사람. 남편 말로는 우리 부부가 겪은 일련의 고통으로 서로 곤란했던 그 시절을 인정하라는 건데. 나는 언니, 말에서 시작한 고민에 불을 지핀 남편 덕분에! 이젠 정말! 이렇게 생겨버린 내 존재가 부담스럽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이건 뭐랄까.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인 데에는 이유가 없었고, 자의도 타의도 아니었잖아. 그냥 내 앞에 갑자기 놓인 상황이었던 건데, 그걸 견디기도 벅찬 중에, 이런 내 존재가 남에게 어려울 수 있다는 것까지 확인하고 감당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문제에 빠지게 됐어. 정말, 남편 덕에 연초에 존재로서의 고민을 하다니! 남편은 엄지에 반짇고리 끼고 앉은 구십 할망처럼, 바늘 찔러대도 피 한 방울 안 날 거란 표정으로 내게 "인정하고 이겨내라" 하네.






언니, 그래서 난 오늘 편지를 급하게 적어. 내 생각과 상황을 글로라도 적어내면 좀 나아질까, 언니에게 말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말이야. 물론 이 감정을 떨쳐내게 해달라 기도하는 중이지만. 뭔가 늘 나에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응답은 없는 것 같아. 신과 나 사이에 엉켜 있는 문제들이 천천히 풀어지고는 있는데, 늘 꼬인 실을 한참은 풀어내야 해. 그 과정에 기도도 하고, 글로 적고, 남편과 싸우고, 그 동심원에 천사 같은 언니가 있다고 믿어. 언제나 말에 준비와 시동이 필요하고, 그래서 편지 한 장을 적는 데도 한 달이 걸리는 언니라면! (웃으며 적는 것임) 반대로, 유독 힘든 말 자체에 머물지 않는 스킬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여. 언니라면 몇 마디 말에서 시작한 내 고민을 함께 앓아주고, 어느 정도 가볍게 날려줄 것 같아. 마침 글 쓰다 생각났는데, 언니가 약간 전자음 같은 기계 목소리로 "말의 방점 위치에 오류가 생겼습니다" 연거푸 말해주면 좋겠다. 그럼 크게 웃으며 떨쳐낼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를 마냥 긍정하고 싶어. 아직 뭐든 이겨낼 힘이 없거든.






점점 알겠어. 사람마다 같은 말을 전하는 형식과 단어와 문장이 다르고, 의도와 다르게 전해지기도 한다는 걸. 그래서 결국엔 받는 사람의 성정과 그릇이 중요한 것 같아. 말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지키느냐, 오해하느냐 기로에 놓이게 되니까. 와중에 나는 쉬이 말 자체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인데, 내가 머물 곳이 말은 아니라 사람이겠지? 미안하다는 갸륵한 생각을 해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우면서도 내가 사람들에게 부담이었다는 게 갑자기 속상했나 봐. 갑분싸에 아뿔싸야 정말. 단어를 고르고, 선택하고, 다시 고치고 다듬는 업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그의 모든 말에 귀 기울이는 건지 모르겠어. 확실한 건, 이번에도 나는 초반에 말의 방점을 잘못 찍었고, 잠시 넘어졌다가, 갑자기 고민의 방향이 뒤틀려 버린 거야. 맞아. 내게는 아직 남이 느꼈을 곤란함까지 '괜찮다, 미안해하지 마라' 할 여력이 없으니까. 갑자기 들은 '미안했다'는 말에 우당탕탕 도망하고 길을 잃은 거 같아. 생각해보면, 어쩌면 연말에 어울릴 고민을 뒤늦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지난해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이틀간 앓으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 더 확인한 것은 말이야. 아픈 일은, 그리고 몇몇 힘든 일은 겪는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 모두를 화이트아웃 시킨다는 걸, 알겠어. 모두가 화이트아웃 중에 누군가는 당장 달려오고, 누군가는 거리를 유지하고, 누군가는 멀리 서고, 누군가는 자책하기도 하며. 각자 자기 모양대로 그 시기를 지나는 거겠지. 언니 나는 나중에 나처럼 힘든 터널을 지나는 사람을 본다면, 물어볼까 해. 지금 네게 가는 게 괜찮은 일이냐고. 혹시 말할 힘은 있는지, 말하고 싶지 않은지 물어볼 것 같아. 그럼 힘든 사람은 잠시라도 주체가 되어 자신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거 같아. 그게 때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드라마 명대사 있잖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며 아픈 마음을 함께 나눠가질래.






사실 지금 이렇게 고민을 따발총 쏘듯 발사하고 편지를 마무리하려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닌데. 이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기도하던 새벽보다, 카레를 먹던 점심보다, 소이라떼를 마시던 오후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아. 결국 이렇게 적어 내려가며 객관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는 일은 역시 큰 도움이 되는 거 같고. 언니, 그래서 말인데. 혹, 이다음에 눈앞이 화이트아웃 되듯 언니를 뒤흔드는 사건이 있다면 나에게 꼭 말해주면 좋겠어. 나는 그럼 중학교 때 외웠던 미국 속담(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처럼, 언니 신발을 신고 문제의 온기와 냉기를 함께 느낄 수 있을 거야. 특별히 언니에게 가장 큰 문제일 육아 이야기도 거르지 않고 해주길 바라. 나도 그랬어, 공감은 못해도 대신 격렬하게 첫째 딸의 입장에서 이야기할게. 남동생이 있는 첫째인 내가 때로 새봄이 입장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엄마로 사느라 미처 딸일 적을 쉬이 잊을 언니가 여러모로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되고 싶거든. 교회에 살며 다양한 육아의 형태를 보아와서 다른 집 사정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것까진 근자감일까! ㅎㅎ 무튼, 나에게 그럴 기회를 주길 바라. 물론 그렇게 휘청거릴 일이 언니에게 부디 잦지 않길 바라지만. 차마 아예 없을 거라고는 말 못 하겠어. 우린 신자라서. 하늘의 사랑을 삶의 여러 모양으로 받고 드러내는 우리로서는. 앞으로 살면서 갖은 시련과 고통이 끊이지 않겠지...? 그렇지만 그곳에서부터 빛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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