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버스 맨 뒷자리의 도인

운명을 바꾼 도핑(Doping)

by JP 정표

대학교 4학년,

내 머릿속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진로는 안갯속에 있었다.


화학과 선배들의 행로는 대체로 비슷했다.
중견 제약회사, 화학 관련 연구소

그리고 빠지지 않던 말.


“우리 학교 간판으로

대기업 연구소는 힘들다.”

그 자조적인 문장이

이상하게도 오래 내 발목을 잡았다.




나도 돈을 벌어야 했다.
어머니의 거친 손을 쉬게 하려면,
당장 취업 전선에 뛰어드는 게 맞아 보였다.

그것이 ‘장남의 도리’라고

세상은 늘 말해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바이더웨이 편의점에서

폐기 도시락을 먹으며 키워온
공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이미 여러 번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미련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날은 유난히 지친 날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습관처럼 맨 뒷좌석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는 남산터널을 지나

홍제동을 향해 덜컹거리며 내려갔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서울의 불빛들이
왠지 남의 세상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허름한 차림의 노인 한 분이

버스에 올라탔다.
텅 빈 앞자리들을 지나,
굳이 내 옆, 맨 뒷자리로 다가왔다.


“학생, 관상이 참 좋네.

근데 눈에 고민이 가득 차 있어.”


평소 같으면

‘도를 아십니까’쯤으로 넘기고 말았을 말.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귀에 남았다.


나는 홀린 듯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내 사주를 묻더니

인생 이야기했다.


화학 이란 학문을 공부했으면

끝까지 가게.
자네는 연구를 해야 풀릴 팔자야.”


논리도 근거도 없었다.

그런데 그 한미다가

내 심장에 묵직하게 떨어졌다.


마치

내 인생의 회로 어딘가에

낯선 물질이 주입된 것처럼




반도체 공정에는

이온 주입(Ion Implantation)’이라는 과정이 있다.


순수한 실리콘(Si) 웨이퍼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 붕소(Boron)나 인(Phosphorus) 같은 불순물을

강한 에너지로 주입해야
비로소 전기가 흐르는 ‘반도체(Semiconductor)’가 된다.


그날 버스에서 만난 노인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이온 빔이었다.

그가 던진 말은

내 결정 구조를 흔들었고,

내 삶의 전도성을 바꿔놓았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결심이 또렷해졌다.


대학원에 가자.

기왕이면, 최고로.

서울대학교로,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이제 돈을 벌어야지

무슨 대학원 타령이냐!”

“정신 나갔구나!”


현실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는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건

누나였다.


“정표야, 네가 하고 싶으면 해.
생활비는 내가 어떻게든 보태볼게.
대신 꼭 성공해야 해.”


그 말은

내게 두 번째로 들어온 도핑이었다.


가족의 희생을 담보로 한 선택,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나는 서울대학교 화학과 대학원 시험에 매달렸다.
장학금, 과외, 아르바이트.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돈’과 ‘학업’의 균형을 맞추려 했다.




버스는 종점, 홍제동에 도착했다.
도인은 언제 내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버스에서 내린 순간,
나는 더 이상

방향을 잃은 대학생이 아니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내 인생 어딘가에서

조용히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날의 버스는

내 인생의 첫 도핑 순간(Doping Moment)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