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 도시락으로 활성화 에너지를 넘던 시절
한남동 언덕 위의 단국대학교.
그 가파른 언덕길은 마치 내 인생의 경사도 같았다.
입학 초기, 나는 겉보기에 평범하고 유쾌한 대학생이었다.
선배들을 따라 술을 마시고, MT에 가서 함께 어울렸다.
하지만 그 평범함을 연기하기 위해
뒤에서는 치열한 계산이 필요했다.
학기 초가 되면 어머니는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부쳐주셨다.
“전공 서적 사라.”
하지만 나는 서점 대신 학교 앞 복사집으로 향했다.
“아저씨, 이거 제본해 주세요.”
빳빳한 새 책 대신, 흑백으로 인쇄된 제본 책을 가방에 넣었다.
차액은 고스란히 내 생활비가 되었다.
강의실에서 남들이 매끄러운 컬러판 교재를 펼칠 때,
나는 링 제본된 흑백 복사본을 꺼냈다.
글자만 보이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가끔은 내 인생도 이렇게 ‘복사본’으로 남을까 봐 두려웠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흘러가면, 복사본 인생조차 지키기 어렵다는 위기감.
그때부터 내 삶의 무게중심은 ‘낭만’에서 ‘생존’으로 이동했다.
나의 주 무대는 학교 앞 편의점,
지금은 사라진 브랜드 ‘바이더웨이(Buy the Way)’였다.
나는 그곳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취객을 상대하고, 물건을 채워 넣는 일은 고달팠다.
주말 야간근무를 할 때는
그곳엔 가난한 고학생에게 주어지는 달콤한 특권이 있었다.
바로 ‘폐기(유통기한 지난 상품)’였다.
삼각김밥, 샌드위치, 도시락…
남들은 찝찝해서 버리는 그것들이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만찬이었다.
“이거 먹어도 안 죽어. 돈 아끼고 좋지, 뭐.”
나는 폐기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말했다.
편의점 구석에 쪼그려 앉아, 차가운 밥알을 데워 먹으며
미래를 꿈꾸었다.
화학식이 어떻고, 반응속도가 어떻고...
입안에서는 유통기한 지난 마요네즈 맛이 났지만,
내가 뱉어내는 꿈의 유통기한은 아직 멀었다.
화학(Chemistry)을 전공하며 배운 것이 있다.
모든 반응에는 ‘활성화 에너지(Activation Energy)’가 필요하다는 것.
물질이 변화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에너지의 언덕이 있다.
그 언덕을 넘기 위해서는 열을 가하거나, 촉매가 필요하다.
그 시절의 나는 편의점의 밤공기와
복사본 교재, 그리고 폐기 도시락으로 버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들은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흡열 반응(Endothermic Reaction)이었다.
나는 주변의 열기(시련)를 흡수하며
내 안의 에너지를 천천히 끓여 올리고 있었다.
졸업이 다가올수록 선배들의 진로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제약 영업직이나 중견기업으로 향했다.
“야, 우리 학교 간판으로 대기업 연구소는 힘들어.”
자조 섞인 말들이 술자리 안주처럼 돌았다.
하지만 나는 그 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테이프 감은 안경을 쓰고도 버텼는데,
폐기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웃었는데.
여기서 멈추면 내 인생의 반응식은 완성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내가 일하던 편의점 이름처럼,
나는 ‘길(Way)’을 사야만 했다.
남들이 닦아놓은 길이 아니라,
내가 값을 치르고 사야 하는 나만의 길.
그 시절의 나는 비록 초라한 ‘더미 웨이퍼(Dummy Wafer)’ 같았지만,
언젠가는 그 위에 꽤 정교한 회로를 새기겠다고 다짐했다.
한남동의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의 첫 번째 공정은,
그렇게 비릿하고도 짭짤한 맛으로 기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