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다운 이후 옐로스톤 로드트립, 그리고 결정 성장의 시간
2020년 여름,
영원할 것 같던 락다운의 빗장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마스크는 필수였고 거리도 유지해야 했지만,
적어도 집 밖으로 나갈 수는 있었다.
우리는 탈출이 필요했다.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산소가 필요했다.
그동안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었지만
동시에 숨 막히게 조여 오던 그 작은 진공 챔버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는 중고로 구입한 은색 혼다 미니밴,
‘오디세이(Odyssey)’에 짐을 실었다.
쌀과 라면, 버너와 코펠.
식당에 들어가는 위험을 피하려 트렁크는 비상식량으로 가득 찼다.
‘오디세이’라는 이름은 본래 길고 험난한 여정을 뜻한다.
그 이름에 걸맞게 우리는 캘리포니아를 출발해,
여러 주를 가로질러 옐로스톤과 그랜드 티턴을 찍고 돌아오는,
왕복 약 5,000km의 긴 길 위에 올랐다.
플레전턴의 작은 투룸을 벗어나 마주한 미국은 비현실적으로 거대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붉은 협곡의 위용,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옐로스톤과 그랜드 티턴의 압도적인 자연.
차창 밖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며,
나는 비로소 폐부 깊숙이 숨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지난 몇 달간 가슴을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오염’에 대한 공포가,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조금씩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끝말잇기를 하고,
지나가는 버펄로 떼를 보며 환호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깨달았다.
지난 봄, 그 혹독했던 락다운의 시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반도체의 시작은 모래다.
실리콘은 다결정(Poly-crystal)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고성능 칩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다결정을
방향이 하나로 정렬된 단결정(Single Crystal)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결정 성장(Crystal Growth)에는 조건이 있다.
불순물이 최대한 제거된 환경, 그리고 아주 높은 온도와 압력.
무엇보다 천천히 식어가는 시간.
조건이 가혹할수록, 그리고 그 시간을 잘 견뎌 낼수록,
결정은 더 크고 단단하고 순수하게 자라난다.
미국에서의 지난 6개월은 우리 가족에게 그런 ‘결정 성장로’였다.
코로나라는 예상치 못한 고온과 고압의 환경.
인종차별이라는 불순물의 위협.
그리고 락다운이라는 강제된 진공 상태.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 따로 놀던 다결정의 입자들에서,
서로의 방향을 맞춘 단단한 단결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매일 삼시 세끼를 함께 나누고,
서로의 불안을 다독이며 버텨낸
밀도 높은 시간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오디세이의 핸들을 잡고 끝없는 길을 달리며 나는 생각했다.
스탠퍼드에서 대단한 연구 성과를 가져가지 못할 수도 있다.
화려한 인맥을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가장 혹독한 공정 조건 속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를 잃지 않고 더 단단하게 결합했으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정 성장’의 결과물이
지금 내 옆자리와 뒷좌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으니까.
결정은 환호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조용히 버틴 날들 위에서 자란다.
여행은 끝났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무언가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좁은 챔버에 갇힌 입자들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