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용량, 신호를 흐리는 불안들
2021년, 미국에서 복귀한 나는 다시 ‘한국의 시간’으로 로그인했다.
회사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내 몸의 클럭(Clock)은 한국의 주파수로 강제 동기화되었다.
1년 사이 공정 개발의 속도는 더 빨라져 있었고,
회의는 더 촘촘해졌으며, 메일함은 붉은 알림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고생했지?”라고 물었지만, 그 말은 인사에 가까웠다.
복귀는 환대가 아니라 즉시 투입이었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 질주했다.
주말 근무는 자연스러웠고, 하루 세끼를 회사에서 해결했다.
몸은 고단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치열함이 싫지 않았다.
나는 뼛속까지 엔지니어였다.
문제가 생기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원인 후보가 떠오르고,
끝내 답을 찾아내는 순간—그것이 나를 버티게 하는 연료였다.
그 시절의 나는 ‘잘 살고 있다’는 감각을 대부분 회사에서 얻었다.
그게 위험한 방식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집은 늘 조용했다.
퇴근하면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고,
나는 작은 발자국 소리조차 조심하며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고리를 잡았다 놓고, 잠든 얼굴만 확인한 채 돌아서곤 했다.
아내는 말이 줄어들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말로 해결할 수 없는 계산을 이미 다 끝낸 사람처럼 보였다.
그 무렵, 장모님은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셨다.
병원이라는 장소가 삶에 들어오면 일정표는 단순해지는데,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검사와 수술, 회복과 기다림.
“괜찮을 거야.”
그 말을 반복하면서,
나는 그 문장이 얼마나 얇은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던 2023년 초, 회사로부터 벨기에 imec 파견 제안이 들어왔다.
해외 파견.
겉으로 보기엔 반짝이는 단어들의 조합이다.
유럽, 글로벌 커리어, 가족과의 새로운 경험.
하지만 나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대신 한숨을 쉬었다.
2020년, 미국에서 해외 생활의 매운맛을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행정 절차, 비자 문제, 의료 체계, 언어 장벽.
그리고 가장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것—이방인의 외로움.
해외 생활은 인스타그램 사진 속 풍경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건 화려함보다 ‘버팀’과 ‘적응’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이번 제안 앞에서 내 마음은 반대로 움직였다.
‘기회’라는 단어가 들릴수록, 그 뒤에 따라오는 청구서를 먼저 떠올렸다.
커리어적으로도 고민이 깊었다.
수석 엔지니어로 기술의 깊이를 가장 치열하게 다져야 할 시기였다.
현지 매니저 역할은 값진 경험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커리어 회로에 달라붙어 신호를 흐리게 만드는
기생 용량(Parasitic Capacitance)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치 않아도 생겨나,
결정적인 순간에 속도를 늦추고 불안을 키우는 불필요한 전하량 말이다.
“다녀오면 내 자리가 있을까?”
“남들은 뛰어가는데, 나만 옆길로 새는 건 아닐까?”
나는 계산을 돌렸다.
하지만 엑셀로는 정리되지 않는 변수들이었다.
그러다 결국, 가장 단순한 항목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한국의 입시 경쟁이 아닌,
다른 문화의 공기 속에서 세상을 먼저 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건 학원도, 책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아빠만이 줄 수 있는 선물 같았다.
마지막 결정을 밀어준 건 장모님이었다.
병실에서, 장모님은 힘겹게 숨을 고르고 우리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이들 위해서 가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아픈 몸으로도 사위와 딸의 등을 두드린 그 한마디.
그 말이 우리의 비행기 티켓이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불확실성(Uncertainty)을 품고 벨기에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유럽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인사가
‘환영’이 아니라
‘청구서’ 였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