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가 다시 시간을 찾은 도시
벨기에 여행 계획을 세울 때
테르뷔렌(Tervuren)을 일정에 넣는 사람은 거의 없다.
브뤼셀 동쪽, 고요한 숲과 왕궁의 옛 정원을 품은 작은 도시.
관광객보다 현지인의 산책과 휴식으로 조용히 하루가 흐르는 곳.
하지만 이 낯선 도시는 나에게 스쳐 가는 ‘여행지’가 아니라
2년간 우리 가족의 치열한 ‘생활지’였다.
반도체 연구원으로, 두 딸의 아빠로 보낸 시간.
그 모든 순간이 테르뷔렌이라는 공간 위에
조용히 새겨진(Etch) 한 층처럼 남아 있다.
최근 e-book으로 출간한 《그래서, 유럽에 가면 저녁이 있습니까?》.
이 책의 제목과 질문은 바로 이곳, 테르뷔렌에서 시작되었다.
S사 반도체 연구소에서 10년 넘게 식각(Etch) 공정을 다루며 살아온 시간.
야근과 주말 근무는 선택이 아니라 ‘엔지니어의 기본값’이었고,
나에게 저녁은 늘 피곤한 밤의 다른 말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테르뷔렌의 일상은 충격이었다.
오후 5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밝은 시간에 퇴근을 하고,
아이들과 숲길을 걷고,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저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이렇게 충전이 될 수 있다는 걸
그곳에서 알았다.
한국에서의 저녁은 ‘회복’이었다면,
테르뷔렌의 저녁은 ‘충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을 복구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낭만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낯선 시스템에서 적응해야 했고,
한국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커리어의 단절로 이어질까 봐 막연한 불안도 느꼈다.
그럴 때면 테르뷔렌의 숲을 걸었다.
걷는다는 건, 복잡한 생각의 가지를 하나씩 쳐내며(Trim)
내 안을 정리하는 공정과도 같았다.
반도체 웨이퍼 위에 촘촘한 회로를 새기듯,
나의 사유와 감정도
이 도시의 시간 속에 차곡차곡 새겨졌다.
결국 테르뷔렌은 ‘일찍 퇴근하는 곳’이 아니었다.
‘나를 다시 새기는(Etch) 곳’이었다.
저녁이란 나, 가족, 삶을 다시 바라보고
천천히 되돌아오는 시간이라는 걸
이곳에서 배웠다.
테르뷔렌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지난 2년 동안 우리 가족은
벨기에는 물론 유럽 곳곳을 느리게 걸었다.
<Etch The Life: 벨기에> 시리즈에서는 관광객의 시선이 아닌 ‘거주자’의 눈,
그리고 데이터를 읽는 엔지니어의 감각으로 바라본 벨기에
도시들을 하나씩 기록해 보려 한다.
그 첫 번째 여정은
우리 가족의 첫나들이였던 겐트(Ghent)로 향한다.